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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Nov 03. 2017

죽음과 이별 앞에서

안개가 걷히고 나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건물들의 윤곽도 살아난다.

저 멀리 사라지는 안개는 더 이상 얘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도로 위의 차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속력을 내 달리기 시작한다.

청소부도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반쯤 붉게 물든 가을 나뭇잎 하나가 도로 가장자리로 떨어진다.

어느새 나뭇잎이 가득 쌓였다.

다음 날 부지런한 청소부는 안갯속에서 도로를 쓸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더 이상 그 붉은 나뭇잎은 사라지고 없다.



최근 모 배우가 사망했다.

가끔 연예인이 사고 혹은 병으로 죽었을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낀다.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그런 기분이 며칠 혹은 몇주씩 가곤 한다.

상대방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알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다.

혹은 현재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직 그 사람이 나와 같은 현재를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활기차고 생생한 그 사람의 모습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그리고 방송에서의 그의 모습을 보며 묻는다.

'당신은 몇 주후에 죽음을 맞이 합니다. 혹시 알고 있나요?'

아침에 일어나니 문득 다시 그 배우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도 내가 언제 죽음에 직면할지 알지 못한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 그다음 날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태어나기 전 기억이 없듯, 죽음 후에도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걸까.

사실, 나는 죽음이라던 지 질병 등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활자로도 쓰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불행이 나에게 혹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엄습해 올까 하는 불길한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났고 그러므로 반드시 죽어야 한다.

참 슬픈 일이다.


죽음은 당연한 것이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틀에 박힌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죽음은 겁나는 것이고 슬픈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시간이 오면 죽음과 싸워야 하고 혹은 받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맞닥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받아 들 일수 있을까?

아니면 충격에 반쯤 미쳐 버릴까?

결코 그것에 대해 지금 확신할 수 없고 그때를 가정해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도 없다.

이별은 연습으로 절대 무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 시간이 오면 매우 슬플 것이다.

이 세상 누구보다 슬플 것이고 아플 것이다.

나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고 처참히 잔해만 남겨질 뿐이다.

그럼에도 무한도전은 여전히 재밌을 것이다.

문상을 왔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웃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동네 고기 집에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고 금요일 밤이 되면 열리는 야시장에는 사람들의 웃음과 아이들의 활기로 가득할 것이다.

가을이 되면 월드시리즈도, 한국시리즈도 열릴 것이다.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가면 사람들은 아쉬워할 테지만 다음 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기도 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문득 생각해본다. 또 길을 걷다가도 다시 그 배우를 생각해본다.

더 이상 그는 나와 같은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  

이제 그 사람의 죽음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어릴적 동네 할머니들의 말처럼 그 배우는 이제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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