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베 르 텔리에,《아노말리》
2024. 7. 7. 해의 날.
0. 106일은 짧다. 106일 전의 나와 송두리째 달라지기에는. 차이라면 한 계절 치 기억. 회귀를 꿈꾸기에도 106일 전이라면 퍽 애매하다, 생각했지만...
106일은 길다. 인생의 변곡점이 생기기에는. 사랑이 식거나 결실을 맺고, 죽거나 죽이고, 폭력을 당하거나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인생작을 출간하거나 노래 한곡으로 벼락스타가 되고, 그간의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 일이 벌어지기에는, 충분히 길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시간이라는 연속선 어딘가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존재할 것이다. 형국이 끝내 뒤집히는 시점이 있고, 그 시점을 지나면 무슨 짓을 해도 고무나무를 살릴 수 없다.” p53
1. 어제는 Y언니에게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왔다. "그냥 똑같아요, 저는." 머쓱하게 웃었다. "별일 없으면 잘 사는 거지." 자상한 말이 돌아왔다. "그러면 앞으로는 잘 산다고 할게요, 아무일 없구나 해석해주세요," 했다. 언니가 웃었다. 대화를 주고 받다 보니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아, 장기하 때문인 것 같다. '장기하식 별일없음'은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아주 그냥"을 의미하지만, 여하튼...
2. 요즘의 나는, 106일 전 혹은 후의 나를 생각해보곤 한다. 봄이 지나고 여름에 들어선 지금까지 삶의 분기점이라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일상의 소소한 기억 외에 다를 게 하나 없는 도플갱어를 떠올려보는 거다. 우열과 비교를 논할 수 없이 모든 게 동일한 존재.
어느날 그런 분신이 불쑥 나타난다면, 그래서 '삶은 하나, 존재는 둘'인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양보할까, 설득할까. 적대할까, 포옹할까. 네게 이 삶을 줄까, 아니면 다른 삶을 청할까. 네가 모험하고 실패해도 괜찮아, 내가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니까, 너는 언제든지 돌아와 내 삶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니면 삶의 베이스캠프를 네게 맡기고 내가 길을 떠나봐도 좋겠지. 네가 힘들면 돌아올게. 우리는 그렇게 함께할 수도 있지.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면 나는 기꺼울 것 같다. 설명도 변명도 필요 없는, 유일한 사이 아닌가. 건네준 모든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유일한 존재이지. 네 흠집은 내 것이고, 내 밑바닥은 너만이 들여다볼 수 있어.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거야.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도 존재론적인 고독은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립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한다.
“또 하나의 나는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 거울 같지만 내 비밀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노출이 되면 나는 변화 혹은 도피를 결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삶에 둘이 있으면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뜻이죠. 틀림없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야, 다 허무하구나. 아파트, 직장, 물질적인 것 전부가... 내면의 알멩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요. (...) 진실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p436
3. '106일'이 지난 뒤 '분신'같은 존재의 출현, 이것은 에르베 르 텔리에의 프랑스 장편소설《아노말리》에서 비롯된 상상이다. SF 소설은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할 수 있어 좋다. 넷플릭스 재질이지만, 영화화된다면 소설의 매력이 깎여나갈지도. 영상의 시각적 쾌감을 포기할 만치 소설의 언어가 매력적이어서다. “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물음”을 지닌 사고실험은, 이 또한 개취일지 모르겠으나, 언어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게 가장 좋다. 2020 공쿠르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911 이후 미국방부는 다양한 항공 교통 교란과 대형재난에 맞춤한 대응-안전 프로토콜들을 만든다. 세계전쟁, 외계인 침입, 공기 매개 전염병, 인공지능의 항공교통 장악 등 온갖 희박한 확률로 예상되는 사건들까지 검토한다. 프로젝트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프로토콜 42가 추가된다. 마치 “동전을 던졌는데 허공에 멈춰 서 있는 경우” 같은.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프로토콜 42가 발동된다. 2021년 3월, 추락 위기의 난기류를 뚫고 뉴욕에 기적적으로 도착했던 파리발 비행기가 3개월 뒤 허공 어딘가에서 복제된 듯 다시 나타난 것이다.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탑승객들을 싣고서.
4. 사고실험 같은 소설들을 예전에는 즐겨 읽었다. 내가 안전지대에 있었기에 사유놀이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현실이 픽션들을 빠르게 따라잡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할 충분한 시간도 없이 변화 속에 내던져지고, 불안은 가중된다. 픽션을 왜 보나, 현실이 픽션 같은데. 그런데 어쩌다 이 소설을 펼쳐들곤 멱살 잡혀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이런 류의 재미는 오랜만이었다. 1부에서 2부로 넘어갈 때, 그리고 ‘대통령들’ 편의 시진핑 에피소드에서, 결말에서 다시 소름이 돋았다.
5. 이중생활을 하는 살인청부업자, 몇 개월만에 파탄에 이른 연상연하커플, 아이를 막 임신한 변호사, 성정체성을 숨긴 채 활동 중인 뮤지션, 말기암을 선고 받은 기장, 문제작을 쓰고 투신하는 작가 등 인물들은 삶의 조건도 기질도, 존재의 상태도 제각각. 무엇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이런 이들이 분신을 만나면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까. 그 선택을 기점으로 삶의 기로는 나뉠 것이고 존재는 달라질 테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새로 형성하는 관계는 이전과 다른 나를 빚어낼지도 모를 일.
“그는 자기 것이 아닌 인생들의 매혹에 굴복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인생을 적확한 말로 풀어내고, 너무 가까워져서 절대로 곡해할 수 없다고 믿기에 이르면 좋겠다. 그런 다음 다른 인생으로 넘어가는 거다. 그다음엔 또 다른 인생으로. 인물 수는 셋, 일곱, 스물? 동시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독자들은 몇 개까지 받아들일까?” pp245-246
“우리 환경 자체를 위조하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디테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시뮬레이션된 인간’은 자기가 사는 가상 환경에서 이상(anomaly)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그 안에 자기 집, 자기 차, 자기가 키우는 개, 자기 컴퓨터가 다 있으니까요.” p238
6. J의 등 뒤로 다가가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곤 귓가에 오래된 농담을 속삭였다.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여?"
그렇게 짐짓 표정을 지우고 장난치면,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울먹이던 때가 있었는데...
"엉, 알았어, 알았어, 잠만...."
이제는 폰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귓등으로 흘려 듣는다.
저거 내 멘트였는데. 세월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