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너스바움,《혐오와 수치심》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며,
우리 마음을 인간애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이 공유하는 비참함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전혀 인간애에 대한 의무가 없을 것이다.
- 장 자크 루소
2024. 11. 7. 낭의 날.
《외로운 도시》에서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은 연인의 변심으로 불안정하고 고립된 처지에 놓였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뉴욕이라는 낯설고 거대한 도시에서 당시 느꼈던 외로움을 그녀는 ‘허기’의 감각에 비유한다.
“그건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신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도 드러나, 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
그리고 ‘아기 울음소리.’
“내가 느끼던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아기 울음소리였을 것이다.(...)나를 제일 무섭게 만든 것은 필요의 감각이었다. 채울 수 없는 심연의 뚜껑을 들어올린 것 같았다.”
‘허기와 아기 울음소리’, 이 말들은 원초적 감정의 근저로 나를 이끈다.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근원적 욕망, 무엇이든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자신이 창조된 아늑한 세계와 분리되어 불완전한 존재로 내던져졌다는 두려움. 태초의 감각과 감정과 소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작과 끝은 동일한 감각과 감정으로 맞물려 있다.
삶의 종착지에서 재등장할 원초적 감정은 심연 깊이 가라앉아있다가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어느 잔인한 손의 분탕질로 솟구쳐오른다. 같은 곳에 뿌리내린 감정들이 모습을 바꿔가며 혼탁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은 때로 극심한 외로움, 혹은 공허와 결핍의 감각을 지닌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신의 형상을 한 구멍이 있다.” 파스칼이 했다고 전해지는 이 선언은, 인생의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심연을 “무한한 불변의 존재”만이 채울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영적 열망만큼 실존적 절망도 도사리고 있다. 나로서 충만해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다양한 형상의 신, 혹은 대체가능한 존재나 대상을 찾아 몰두하지만, 믿음은 깨지고 관계는 끊어지며 열정은 식는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 허기를 닮은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인생의 다양한 사건과 연계된 감정들을 원초적 감정으로 환원하여 바라보기. 너스바움을 읽고서 갖게 된 감정의 프레임이다. 분노, 혐오, 시기, 수치심. 특히 관계와 공동체를 위협하는 감정들은, 원초적 두려움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볼 때 그 특성들이 보다 뚜렷해진다. 갈급히 원하는 것을 거절당했고 받아 마땅한 것을 갈취당했다는 사고, (약한) 타인을 비난하고 배제함으로써 불안을 떨치고 통제력을 되찾으려는 욕망, 통제되지 않는 삶과 자신의 취약함(불완전성)을 상기시키는 대상을 향한 폭력성.
《타인에 대한 연민 The Monarchy of Fear》에서 너스바움은 분노를 군주적 감정이라 일컬었지만, 분노만이 아니라 혐오, 시기, 수치심 모두 군주적 사고방식이 빚은 자기애적 감정들처럼 보인다. (불의를 향한 정당한 분노, 더 나은 방향으로 자신을 이끄려는 건설적인 수치심, 인류의 생존을 도왔던 혐오는 제외하자.)
이런 시각은 내 감정이 피사체가 될 때 선명도가 가장 높다. 나는 감정의 대상에게 어떤 믿음과 가치를 투영하는가, 이 감정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정당하고 타당한 감정인가.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스바움은 현실 정치와 법이 당면한 주요 이슈들을 논의하고자 '감정'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이성만을 논하고 요할 것 같은 정치·법철학자가 감정을 철학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은 감정만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인간이란 존재와 인간성에 대해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이 들곤 했다.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은 영향력과 파괴력이 가장 강한 두 감정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혐오와 수치심은 부제에서처럼 '인간됨'의 상태와 조건을 외면하고 훼손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면 이 감정들이야말로 생명체로서의 취약함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인간본성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표지의 그림과 제목은 감정의 핵심을 꿰뚫는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리는 누군가를 필히 혐오하거나 혐오의 시선에 놓이게 될 것이며, 수치심을 안겨주거나 수치심에 사로잡힐 것이다. 생의 조건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으며 그에 따른 가치판단에 갈기갈기 찢길 테다. 아늑한 정원에서 찬란한 빛을 만끽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불완전함에 몸을 떨며 시드는 날들이, 생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뿌리 뽑히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있을까. 요즘처럼 혐오가 범람하고 그로 인한 수치심에 노출되기 쉬운 때에.
'인간 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자유와 평등', ‘상호존중’, 그리고 '인간의 존엄'. 이런 가치와 사회적 약자를 수호하는 최소 안전망인 ‘법’의 영역에서, 혐오와 수치심이 지닌 파괴적인 힘을 점검하는 것. 이는 궁극적으로 시민사회를 혐오와 수치심으로부터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본성의 일부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거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날 때부터 왕이거나, 영주이거나, 신하이거나, 부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벌거벗고 가난하게 태어나며, 삶의 비참함, 슬픔, 병듦, 곤란과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며, 종국에는 죽게 된다.
(...)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며, 우리 마음을 인간애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이 공유하는 비참함이다.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전혀 인간애에 대한 의무가 없을 것이다.
모든 애착은 부족함의 표시다.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 자체에서 우리의 덧없는 행복이 생겨난다.
(...)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장 자크 루소,《에밀》4권
너스바움은 1장 <감정과 법>에서 감정의 법적 수행력과 타당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인지주의적 관점으로 감정을 분석한다. 감정에 대한 두 가지 통념이 있다. 하나는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정을 신체적 반응이나 정서적 감각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너스바움은 이런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정은 '지향하는 대상'과 '대상에 대한 믿음과 가치'라는 인지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특정 대상에 대한 평가적 판단을 이끌어낸다고 너스바움은 말한다. 따라서 특정 감정에 들어 있는 인지적 판단과 욕구를 분석하여 법적 근거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을 재점검한 뒤 2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혐오와 수치심의 구조, 이들 감정이 품은 사고의 내용과 기원, 사회적 역할 등을 고대 스토아학파, 정신분석학(주로 대상관계이론)과 (밀을 위시한) 공리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등을 토대로 탐구해나간다. 주장의 핵심은 수치심과 혐오를 법적 행위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 수치심과 혐오가 법을 제정·집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는지, 정치적이고 법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때 어떻게 시민사회를 위협하게 되는지를 대략 700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한다.
올해 가장 큰 독서 수확은 마침내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서문과 1장, 7장은 무조건 강추. 700 페이지 가량 이어지는 관련 이론들의 압박이 상당하지만, 생각보다 술술 넘어간다.
이제《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을 읽을 차례.
“인간 삶을 특징짓는 구조 자체가 비이성적 감정을 갖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삶 속에는] 이성적 감정을 가로막는 일정한 구조적 장애물이 놓여 있기 때문에, 적절한 감정을 성취하려는 몸부림은 모든 인간에게 힘겨운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혐오와 수치심에 관해 이야기할 장들에서 내가 주장하려는 바다.” (p75)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이다. 감정은 세상을 구성하는 항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유도한다.” (p77)
“일반적이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에 대한 합성 사진처럼 실제로는 허구적인 구성물이다.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p398
“정상은 철저히 규범적인 개념이고, 완벽함이나 완전무결성을 대신하는 것이다.” p401
“자기 자신을 ‘정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면에서 볼 때 일반적이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좋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안정을 찾는다. 정상인들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완전하고 좋은 사람으로 정의하고 그런 사람들로 자신을 에워쌈으로써, 위안을 찾고 안정이라는 환상을 얻는다. 정상성이라는 관념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자극을 덮어주는 대리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어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낙인찍어야 한다. 정상인들은 자신의 신체가 파괴되기 쉽고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낙인찍을 때 자신의 인간적 유약함이 훨씬 더 낫다고 느낀다.” p399
“수치심을 외부 대상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소인을 찍음으로써 정상인들은 일종의 대리 행복을 얻는다. [외부를] 통제하고 완전무결해지려는 유아기적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p400)
“나는 ‘역량’이 정치행위의 적절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해 왔다. 역량이란 ‘기능성’이 아니라 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p609)
“누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고자 할 때,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p624) 책의 마지막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