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 콘웨이, 《물질의 세계》
“나는 ‘물질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
그러니까 ‘비물질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너무 오래 살았구나.” p23
2025. 4. 26. 흙의 날.
그는 이제 대서양 한가운데, 시속 80km 무역풍에 휘청이는 탐사선을 타고 있다. 수천 미터 아래 잠겨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저 산맥 위에 배는 떠 있는 셈이다.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를 관통하는 대서양 중앙해령에서는 판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지질활동으로 새로운 땅이 형성 중인데, 이곳에 있는 해저 언덕 두 곳으로 탐사대는 향하고 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구리함량이 높은 황동석이다. 어쩌면 향후 수십 년간 전 세계의 전력을 책임질 양의 구리가 매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에드 콘웨이의《물질의 세계》'구리' 편을 읽고 있다. 온 대륙을 종횡무진하던 저자가 마침내 해저까지 향하고, 나는 살짝 기가 질리는 기분이 든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가 싶다(반도체 편에서 한국에 올 줄 알았던 저자는 대만으로 갔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이제 절반을 넘어선 여정을 기록해두기로.
콘웨이는 프롤로그에서부터 물질들이 세계를 구축하기까지의 여정을 놀라우리만치 세밀하게 그려댄다. 이 여정은 생동감 넘치고 현장감이 뛰어나다. 우리의 현실세계와 점차 유리되고 있는 '물질'의 물리적 감각을, 실재하는 감각을 되돌려준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가 결정적 장면으로 직접 들어가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술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장들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데, 그 발자취를 선으로 이어보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만 했다. 그런 지도가 있다면, 이 대체불가능한 물질들이 얼마나 유기적이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지 한눈에 보일 텐데. 이들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 세계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연쇄적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그러기엔 읽고 발췌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형편이라 아쉽다.
책은 가독성이 굉장하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함을 못 느꼈다. 이변이 없다면 상반기 베스트. 다른 책으로 한눈팔기 어려울 정도로 재밌다. 암벽을 폭파하여 얻은 바윗덩어리를 용광로에서 녹이고, 흔적 없이 깨부수고, 갈아서 용해한 용액을 고온으로 증류하고, 산산조각 낸 원자를 재구성하여 반도체 등급의 폴리실리콘을 얻어내는 과정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일인가. 그건 콘웨이가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형태와 과정을 보고 현장의 소리를 듣고 열과 무게를 감각하게 해준다.
모래의 반도체칩 편을 예로 들자면, 그는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세라발 채석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야구공만 한 석영 덩어리를 눈앞에 들이댄다. 내 앞에 놓인 노트북과 스마트폰의 핵심이 바로 이 하얀 돌덩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석영암이 고체/액체/증기 등의 변신을 거쳐 지구상 물질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물질로 거듭난 뒤 1-200개의 칩으로 잘게 조각나 보호막을 입고 손톱 크기만 한 제품이 된다고. 중세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용광로의 원시적 현장과 (불순물 매개체인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 실무를 맡는 최첨단 클린룸을 감각적으로 대비시킨다.
모래의 여정은 스페인의 광산에서 시작되어 독일의 폴리실리콘 공장과 미국의 웨이퍼 공장 클린룸을 거쳐 마침내 최첨단 공정이 기다리는 대만 남부로, 끈적이는 대기 속에서 사탕수수밭과 양배추밭을 지나 은빛외장으로 반짝이는 TSMC의 Fab 18, 반도체 칩 공장으로 향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마지막 옷을 입고 중국에서 조립된다.
그리고 나는 클릭 한 번에 빠른 배송으로 제품을 받아든다. 이 속에 숨은 모래의 정체는 알지 못한 채. 이를 둘러싼 국가들의 암투를, 거미줄처럼 얽힌 재료와 기술 들의 공급망이 물질세계의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세계를 그토록 단순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번영과 혁신을 약속하는 0과1의 세계에서 소비자와 향유자로 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GPT를 공부메이트로 삼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늘 꺼림칙하다. 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모든 자원이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리편을 막 마쳤다. '모래, 소금, 철'을 끝낼 때마다 그러했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놀랐다. 물질의 경이, 인간의 상상과 의지와 욕망, 물질세계의 되풀이되는 역설, 그럼에도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낙관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의) 애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센트럴 파크보다 넓고 세계 최고층빌딩보다 깊은, 칠레의 추키카마타 구리광산, 그 아득하리만치 거대한 구덩이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제 석유와 리튬이 남았다.
“이 세계가 없다면 당신 손 위의 아름다운 스마트폰은 작동하지 않고, 전기차는 배터리를 갖지 못할 것이다. 물질 세계는 당신에게 화려한 집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집이 계속 버티고 서 있도록 지탱한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당신을 따뜻하고 청결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준다.” p24
“인류는 이 물질들이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번영을 누리진 못할 것이다. 6대 광물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즉각적인 대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이 세상을 구축하도록 돕고 있으므로, 고갈된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 어떤 문명의 붕괴 혹은 승리는 6대 물질 중 어느 하나가 없거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p30
“유리는 근본적 혁신이었다. 바퀴, 증기기관, 반도체처럼 다목적 기술로 활용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마법의 제품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인류의 상상력에 더 큰 날개를 달고 더 과감한 발명을 시도하게 했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오늘날에도 유리는 이런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인터넷은 대개 광섬유를 통해서 전송되는 정보의 망이다.
(...) 유리가 없었더라면 최첨단 컴퓨터의 두뇌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녹인 모래에 불과한 물질이 이룩한 업적 치고는 나쁘지 않다.”
- p55, Part 1. 모래 <1장 유리로 바라본 세상>
“이 물질을 무시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와 권력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품목이었고 이름 모를 다양한 소금이 우리 삶을 지탱해왔기 때문에 인류의 초창기부터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 p158, Part 2. 소금 <4장 생명의 물질>
“석탄과 철은 산업혁명의 탄생을 도왔다. 석탄은 기계에 연료를 제공했고, 철은 기계를 만드는 원료가 되었다. 이 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서로 긴밀히 얽혀 있었다.
(...) 이것은 단순한 산업혁명이 아니었다. 물질 혁명이었고, 무엇보다도 에너지 혁명이었다. 인류가 나무와 목탄에서 화석에너지로 이동하는 최초의 위대한 에너지 전환이었다.” p 271
“무엇이 강철을 물질 세계의 주축으로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강철의 기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동시에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 강철은 놀라운 물질적 진보였지만,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아니라 대량생산기술 같은 따분한 것, 표준 설정 같은 더 지루한 것에 의존해서 삶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 p274, Part 3. 철 <8장 용광로 속으로>
“구리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위대한 기본 물질이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만약 구리가 없다면, 우리는 글자 그대로 어둠 속에 내몰릴 것이다. 강철이 세상의 뼈대를 세우고 콘크리트가 살을 붙인다면, 구리는 문명을 이루는 신경계라 할 수 있다. 구리로 만든 회로와 전선이 없다면 세상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구리 이야기는 인간의 생활 수준을 뒤바꾼 놀라운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이 금속을 찾아 캐내기 위해 얼마나 땅속 깊이 들어갔는가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이것은 규모와 결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 pp313-314, Part 4. 구리 <10장 구리의 시대>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최근 몇 년간 내건 다양한 약속을 이행하려면 엄청난 양의 구리가 필요하다. 탄소발자국을 줄이겠다는 말은 곧 구리 발자국을 늘린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구리를 재활용으로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쁜 소식은 (...) 우리가 필요한 양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진짜 문제점과 마주한다. 구리가 부족할까 혹은 구릿값이 너무 오를까 하는 염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진짜 걱정해야 하는 점은 구리 생산국들에서 얼마나 참아줄까이다. 현재, 칠레와 페루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구리 채굴에 따르는 환경 부담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채굴 한도를 두기 시작했다.”
- p353, Part 4. 구리 <11장 땅속으로 더 깊이>
“제라드 배런이 말하는 ‘최후의 대규모 채굴’이 해저가 아니라 사막 풍경을 망치는 폐석 더미에서 이루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토르타(암석쓰레기 산)에서 폐석을 꺼내어 구리를 쥐어짠 뒤 풍력발전 터빈과 태양광 패널에 사용한다면? 남은 흙은 인공 계곡에 다시 쏟아 넣는다면? 이렇게 되면 추치카마타의 건물들은 돌무덤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타카마의 계곡에 더는 가짜 언덕이나 계곡이 산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거대한 구덩이를 다시 메우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결말 아닐까?”
- p373, Part 4. 구리 <12장 새로운 국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