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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Dec 09. 2024

석탄의 온기를 머금은 아름다운 손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연말연시의 달뜬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간 한 해를 아쉬워하는 마음도 크겠지만 '내년은 올해보다 낫겠지, 조금은 더 행복하겠지'라고 되뇌며 두꺼운 먼지로 뒤덮인 희망의 자리를 쓸고 닦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에게는 희망을 떠올리는 짧은 순간조차 호사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쉴 틈 없이 불행의 융단폭격을 견뎌야 하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손을 잡아 줄 다른 사람의 손이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단 한 사람의 손이 미술품 복원가처럼 섬세한 손길로 부스러진 영혼을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에서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살면서 석탄을 파는 '빌 펄롱(킬리언 머피)'. 그는 단조롭고 평온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커다란 상처를 품고 있다. 그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아서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엄습해 그의 수면을 방해하고 급작스러운 눈물을 유발한다. 빙하의 크레바스(crevasse,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처럼 깊은 상처를 지닌 그가 어떻게 타인에게 온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그를 윌슨 부인과 네드 아저씨가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빌의 유년 시절은 그에게 평생 동안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긴 동시에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빌이 사는 아일랜드의 소도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작은 공동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에는 수녀원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녀원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건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귀를 닫고 입을 닫는다. 오직 빌만이 고통받는 소녀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삽으로 석탄을 푸고, 포대에 담고, 운반하느라 빌의 손은 늘 거무튀튀하지만 그의 손은 이 세상 그 누구의 손보다 맑고 따듯한 손이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처럼 마음이 여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찬찬히 보여준다. 빌의 마지막 선택은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이 무엇일지 곱씹게 만든다. 

    '빌 펄롱'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뿐만 아니라 수녀원장 '메리' 역의 에밀리 왓슨, 빌의 부인 '에일린'을 연기한 에일린 월쉬, '사라' 역의 자라 데블린 등 주조연들의 연기 앙상블이 빛난다. 정중동의 카메라 워크는 특정 공간과 인물들의 관계성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운 연말이지만 빌처럼 사심 없는 이타심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끝)


* 씨네랩의 초청으로 12월 4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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