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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 Oct 27. 2023

권리와 의무


 아직은 한국인.

영사관에 해외체류자로 이미 한참 전에 등록했고 캐나다 영주권을 가지고 캐나다인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고 사는 한국 여자.


 캐나다 시민권을 따고도 남았을 지난 18년, 남편도 캐나다 사람, 아이들의 연고가 한국이 될 희미한 미래 등을 생각해서라도 캐나다 시민권을 시원하게 따고도 남았을 시기에 나는 아직 시민권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한국의 바뀐 이민법을 따르더라도 이중국적 허용을 받지 못하는 1984년생의 나는 살고 있지도 않은 내 나라에 왜 그렇게 집착하고 못 버리는지 모르겠다.


 3년 전 할머니가 유서 없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 문제 등등으로 인해 대리인 동의서를 캐나다에서 공증받아 한국에 보낸 적이 있고 그 과정에 말소되었던 내 한국의 주민등록이 되살아나 가끔 국민연금 보험공단에서 독촉장이 날아온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하시길래 한국에 방문해 있는 동안 처리해야겠다 싶어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했다.


한국의 친구들은 이제 운전면허증을 사용하거나 대개 새로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지만 나는 처음 주민등록증을 받은 2003년도에 발급받은 20년 된 주민등록증을 들고 방문한 행정복지센터에서 사실 처리하고 싶었던 몇 가지 일이 더 있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동생(새엄마의 아들)의 거처를 알아내기.'

'할아버지 주소 밑으로 다시 등록되어 있는 내 주소를 말소시키기.'



 유모차 안에 만 셋 딸아이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고 뽀로로 음료수와 말랑한 젤리를 쥐어주고 이십 년 된 내 주민등록증을 복지센터 직원에게 보여주며 하고 싶은 일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내 이름으로 발급받을 수 있는 모든 문서를 다 발급받고 싶다고 했다.





문서 한 건에 500원, 1000원인 경우를 따져 나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떼는 비용은 6500원.


소모한 시간은 세 시간 반.


동사무소 한 곳에서 졸려 보채고 심심해 보채는 아이를 어르고 달랜 세네 시간 뒤에 6500원어치의 문서를 떼고도 나는 동생의 거처를 찾지 못했고 주소 말소, 변경, 해외 이주 뭐 이런 것도 못한 채(원래 하려고 하던 거 아무것도 못함) 집으로 돌아갈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유모차 안에서 피곤해 잠든 아이를 보다 생전 처음 가 보는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화가 좀 나 이런 생각을 했다.


'내 가족들 사진(나랑 남편, 애들 셋이 화목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 같은 거) 한 장 그 집에 보내버려?'


아주,

엉망진창 난장판을 벌여봐?



못할 것도 없다.

안 할 이유도 없다.


남편 말처럼 다음에 한국에 왔을 때 가족 다 대동해 집 앞이나 회사 앞에 돌연 나타나?



나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와 카카오 택시를 기다리는 십 분 안에 마음이 평안함과 안정에서 거부할 수 없는 미움과 증오들로 들끓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더러운 방법으로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현행법상, 나는 새엄마의 아들인 내 동생을 찾을 권리가 없고, 굳이 이 친구를 찾으려고 한다면 경찰서에 가 실종신고를 해야만 실거주지를 알아낼 수 있으며 실수로 재 등록된 내 주민등록은 굳이 한국에서 말소하려면 국세증명서를 떼 서울에 있는 외교부까지 나가야 말소가 가능하다는 걸 세 시간 후 알게 된 나는 한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의무가 가장 큰 사람은 '친엄마'라는 사실에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생각지도 않게 손쉽게 발급받아 손에 쥐고 나서야 딸을 몇 번 버린 엄마와 엄마의 존재가 무색한 딸 두 사이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친엄마의 이야기다.


몇 달 전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뜬 어느 날, 뒷마당에 있다 집 안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보다 페이스북에 누군가 친구초대를 한 알림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친엄마'였다.



만 열네 살의 큰 아들이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아예 끊었으니 십 삼 년만.

영어로 기재되어 있고 필터를 심하게 쓴 것 같은 엄마의 프로파일을 보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제 육십이 넘은 엄마의 얼굴을 보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친구요청을 했을 때처럼 프로파일, 페이스북 페이지, 친구목록들을 가만 보다 온통 외국인뿐인 친구 목록에 이거 왠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혹은 내 페이스북을 보기 위한 엄마의 '제2의 계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친구요청까지 했다면 아마 전체공개로 되어있는 내 포스트들을 다 본 것이 틀림없겠고.


이 아주머니, 어이가 없네? 싶은 것이 나의 처음 리액션.



남편에게 엄마에게서 친구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얘기하니 캐나다인 남편은 그 여자 주소 좀 알아내란다. 한국에 다 같이 가서 엄마 가족들(남편과 엄마 아들) 앞에 애들 데리고 나타나자는 남편을 말리며 할머니가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란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까지 내가 '상상하는 여자'를 통해 올린 글들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내가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를 열한 살에 여의고 조부모님과 함께 성장한 이야기를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제가 쓰는 이야기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간 제가 써 온 글들을 돌아가 읽어주세요!)


 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친엄마의 존재를 모르고 컸다. 아빠는 내가 채 두 살도 안되었을 무렵 나의 친엄마와 이혼 후, 이년도 되지 않아 내 동생을 낳아준 새엄마와 재혼해 나는 새엄마와 내 아주 어린 유년시절을 보내 친엄마의 존재를 몰랐고, 사업에 망한 아빠가 술에 심하게 중독되어 간경화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친엄마와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조부모님과 함께 성장하면서 스물한 살 때까지도 연락 없이 살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스물둘, 그간 이렇게 살아 너무 미안하다며 앞으로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던 친엄마를 만나 경기도 성남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엄마를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그녀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으로 떠나게 된 내 이야기는 이미 많이 했다.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한국작가협회를 다녔고 KBS에서 일을 하던 스물두 살의 내가 번갯불에 콩 궈 먹듯 엄마를 만나 얼마 되지 않아 유학길에 오르게 된 이유는 엄마였다.



남편의 중고차 매장, 자신은 그 옆에서 차 보험사무소를 운영하던 엄마는 할머니를 대동해 같이 만난 첫 만남에서 시멘트 공장 안 식당 안에 있는 컨테이너가 방인 나를 보고 이렇게 사는 줄 몰랐다며 내 앞에서 엉엉 울어댔었다.


 "너 어렸을 때 엄마가 너 좋은 것만 입히고, 먹이고, 얼마나 예쁘게 키웠는지 아니?"

엄마는 스물한 살이 된 나에게 울며 말했다.




스무 살이 넘어 엄마를 굳이 만난 이유는 할머니의 조언 때문이었다.

"너 나 죽고 없으면 넌 세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어떡하니? 엄마라도 하나 있는데 만나봐."


그렇게 해서 만난 엄마는 자신이 거처하던 인천 어느 동네에 원룸 아파트를 구해 옮겨 주었고 나는 은인이던 할머니를 떠나 경기도 성남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자신과 이혼하면 다시는 네 딸 볼 생각하지 말라고 칼을 들고 위협을 해 아빠가 너무 무서워 다시는 나를 볼 생각도 못했다던 엄마의 상황을 들어보니 이해할 만도 했지만 엄마는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많은 드라마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혼한 남편은 초혼인지라 자신이 재혼에 딸을 낳은 이력을 밝히면 결혼을 못할 것 같아 말을 못 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 이해는 하고 시작했지만 그런 엄마의 삶 속에 막상 들어가니 나는 없는 사람이기도 했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엄마는 남편은 있지만 남편은 모르게 자주 만나는 '친구'(남자)를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집을 구해 스파이로 고용해 심어 놓았고 나한테 살라고 얻어준 아파트에 나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와 재떨이를 가져다 놓고 카페처럼 이용했다.

 남편이나 아들에게 전화가 오면 나는 친구가 되거나 거래처 사람, 혹은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침묵을 지켜야 했고 엄마가 특별히 미안한 날이면 쇼핑 하라며 현금을 쥐어 받았다.



'내가 첩도 아니고.'


엄마를 만나 이사를 가면서 드라마 없는 따뜻한 양지에 살 날들을 기대했지만 사실 존재조차 밝힐 수 없는 첩같이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일을 마치고 여의도에서 인천까지 돌아가면 어둠이 깔린 빈 아파트에 들어가는 길은 나 스스로 무덤을 찾아 들어가는 길 같이 느껴져 도저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몇 번은 이유도, 미리 연락도 없이 경기도 성남, 할머니가 계시는 곳까지 돌아가 하룻밤을 청하곤 했다.



가까운 데 두고 평생 돌봐주겠다던 엄마도 내 존재와 거처가 시간이 갈수록 불편해졌음을 이해한 건 필리핀에서 십몇 년을 공부해 석사 박사 학위를 따 지방 어느 대학 교수라는 자신의 남동생(삼촌)을 연고로 삼아 필리핀에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는 엄마의 말이었고 '이렇게 엄마의 음지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어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곁에 조금만 더 있다간 평생 걸리지 않았던 스트레스성 장염으로 오밤중에 응급실에 네 발로 찾아가는 일이 더 잦을 것만 같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당시엔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엄마에 대해 깊게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엄마의 모든 상황, 내가 처한 상황을 모두 얘기하면 엄마는 할머니에게 혼날 일이 분명했고 할머니도, 엄마도 두 분 다 배려하는 차원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이야기가 나오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난 한국을 그렇게 떠났다.





 필리핀에 도착해 두세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엄마는 나를 만난 걸 후회하고 할머니에게로 돌아가라는 긴 이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한 달에 사십만 원 하는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홈스테이집에서 나와 필리핀 애들이 거주하는 판자촌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였다. 엄마가 보내주는 한 달에 보내주는 오십만 원으로 홈스테이에 사십만 원을 주고 나면 남는 것은 고작 십만 원. 이렇게 사느니 필리핀 애들이 거주하는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십만 원짜리 임대료의 단칸방을 빌려 살면 남는 돈이 훨씬 많아 나름 빈곤하지만 현명한 유학생활을 하겠다고 했더니 한국에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내가 '보상심리가 있는 아주 나쁜 아이'로 설명해 내가 필리핀에서 엄마 만나 명품백이라도 들고 휘황찬란하게 살고 있단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게 첫 번째 연락을 끊고 지내다 몇 달 뒤 미안하단 얘기를 듣고 화해한 뒤 비슷한 일로 다시 싸워 연락을 끊었다.


한국이 아닌 나라에, 외국에 꼴랑 삼백만 원을 쥐어 대학에 가라고 보내놓고 얼마나 허리띠를 쥐어매고 살길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십 년 만에 친엄마를 만나 일 이년만에 몇 번이고 버려진 느낌은 열한 살, 아빠에게 죽도록 맞아 온몸이 멍이 들었을 때보다 아팠던 건 분명하다.



그러다 캐나다에 오게 되었고, 첫 아이를 낳을 무렵 다시 연락이 닿은 엄마와 마지막 연락이 된 것은 2009년 무렵 즈음, 첫 아이를 낳고 갓난아기인 아들을 안고 있던 어느 날 엄마가 당시 쓰던 네이트온 쪽지로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보낸 내 쪽지를 엄마의 아들이 보고 '정민지'라는 여자가 누군데 엄마한테 엄마라고 부르냐며 물었단 아들에게 '캐나다에 사는 친한 친구의 딸'이라고 설명했단 얘기를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된 그제야 생각했다.

'세상이 두쪽 나도, 내가 낳은 내 자식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숨기는 일은 없어.'



엄마가 나를 진짜 딸로 생각한다면 남편에게, 그녀의 자식에게 나를 숨기는 일은 없어야 했다.

뒤적여 다시 돌아보기 싫은 과거라도 내가 산 나의 과거이니 떳떳하게 밝히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나 어렵게 찾아 다시 만났다면 돈이 되었든, 자존감이 되었든 성년이 되어 만난 자식에 대해 굽히고 이해할 아량이 있어야만 했다.


엄마 없이 자란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가 낳은 아이에겐 내가 엄마로서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을 나에게 여러 번 한 나의 엄마에게 엄마는 엄마대로 사시는 게 좋겠다고,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연락하지 말자고 이메일을 보내고 그녀의 이메일을 차단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에게 울며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내 엄마야. 난 할머니가 가슴으로 낳아준 딸."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고 언제부턴간

난 엄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엄마라면 내가 겪은 고통과 드라마는 감당할 만한 일이라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3년.

내가 낳은 내 딸을 데리고 돌아간 한국 땅에서 생각지도 않게

행정업무 사무소에서 잔뜩 만난 나의 친엄마.


찾고 싶은 내 동생의 거주지는 근처에도 못 가고 내가 살고 있지 않은 한국에서 내가 권리와 의무를 최고로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친엄마'라는 사실이 불쾌해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 찰나 사무소 직원이 또 그런다.


"혹시 이 친모분이 돌아가시면 그분이 남기신 재산이나 빚도 어머니(나)에게 그 권리와 의무가 돌아가게 돼요."


 이건 또 뭔 개소리.


친엄마의 출생지부터 시작해 현재 주소까지 모두 공개되어 있는 엄마의 주민등록등본을 떼다 하는 직원의 소리에 한국의 가족법 현행에 대해 무릎을 치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이십 년 된 주민등록증 하나로 받아볼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문서에 너무나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는 엄마와 나 사이를 어떻게 그녀는 숨기고 살 수 있었던 걸까.


 환갑이 넘은 엄마의 남편과 이제 서른이 넘은  아들은 단 한 번도 엄마와 관련된 문서를 떼 본 적이 없는 걸까?


이제 연락하지 맙시다, 한 마디로 끊어질 사이는 아니라는 엄마와 나의 관계.





엄마에게서 온 페이스북 친구요청은 삭제했다.

그리고 그 계정에선 내 페이지를 볼 수 없게 차단도 시켜 놓았다.


딸에 대한 그 어떤 의무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엄마는 지금 잘 살고 있는 나를 볼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침드라마, 주말드라마 막장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남편과 자식들을 대동해 엄마의 집 앞에 나타날 수도 있고 사진 한 장을 보내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난 사실 그런 엄마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미움도 증오도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해 마음이 평화로운 것은 오래되었다. 할머니를 엄마로 생각하고 난 후다.




"Juda's kiss"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가 예수님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캐나다에 이렇게 정착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이쁜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엄마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 없이 아이들을 키운다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지금의 삶이 없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몇 번이고 버린 과거의 이야기는 분명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는 일', 'Juda's kiss(유다의 키스)'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예수는 아니지만.



불편하지만 꼭 벌어져야만 했던 일에 대한 내가 붙인 농담?





 

불완전한 내가 완전한 내가 되는 동안 나를 끊임없이 안아준 사람들은 충분히 많은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난 그 어떤 권리와 의무도 행할 수 없는데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엄마에게 평생을 말 못 할 뒷방 이야기로 남아 살 그 어떤 이유와 변명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변호사를 고용해 '호적 정리'를 할 생각이다.



'친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걸어 친모와 자녀관계로 등록되어 있는 엄마와 나 사이의 연을 확실히 끊는 방법.


한국에 살고 있지도 않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강해지고 단단해진 지금의 내 삶에 도저히 매듭 되어지지 않는 엄마와의 있지도 않은 관계를 확실히 완전하게 끊어낼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지어 놓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위한 일이다.


그것이 엄마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진 모르겠고 내가 걱정할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모르고 지내는 게 편안한 가족관계를 법대로 깔끔하게 정리하겠다고 결심하고 변호사까지 고용해 호적을 정리하는 마흔살이 되었을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엄마도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지.


것도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상대할 가치도 없고.





화난거 아니에요.

깔끔하게 정리된거 좋아하는 아줌마에요.



그렇게 사람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한 루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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