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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Apr 26. 2024

참 얼마나 감사한 인연인가

여전히 날 일정부분 괴물로 만들어서 키워준 엄마여서 때때로(솔직히) 매 순간 엄마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 싫지만,


지금껏 나를 뽐내오고 나를 본인인 것 마냥 드러내 왔던 그녀의 방식들을 오늘 한 번 쭉 훑어 보았다. 카톡이며 카카오스토리이며, 나의 외향과 해 왔던 것에 대해서 대다수의 것들을 본인의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마치 자신이 해 온 것 같이 뽐내는 나의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허세에 대하여 나 또한 영향을 받아서 그런 식으로 여전히 넌지시 표현하지만 실은 일적으로 많은 부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언제나 내가 지닌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면 죽음이라는 것 만큼 아픈 것에 대하여 그녀를 탓하진 않는다. 어린 나이에는 그냥 그대로 흡수했지만 이제는 그럴 나이는 지났다.


난 그녀의 소유물도 아니고 장식품도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어여뿐 딸이자 꼭두각시도 아니다.

난 그냥 나다.


그러한 그녀의 병적인 집착 (사실 본인이 어떠한 짓을 하는지도 의식적으로 알지도 못함)뒤에는 엄청 큰 두려움이 있는데, 그건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 또한 그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그러한 방식으로 살 수도 있고, 아름다움과 소유에 대한 욕망 자체가 마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 수도 있지만 실은 진짜의 아름다움은 자신을 어떻게 가꾸고 독립적으로 생활하느냐에 걸려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수많은 관심과 예쁨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정작 나와 동시에 서로를 좋아했던 이성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감사함을 느끼는 건 그들은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수년간 지속해오면서 만나오고, 혹은 아주 짧게 만났어도 정말 깊었던 관계나, 혹은 적당히 긴 기간동안 만났던 사람은 나에게 의도하면서 예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종종 지인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 지인분들이 나를 보고 예쁘다고 하면 그제야 너가 예쁜가보다 하는 게 실은 전부였다. 사실 우리가 소통할 때 서로에 대해서 많이 그렇게 물어보진 않았어도, 왜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네가 지랄맞는데도) 왜 좋아하는 지 모르겠다.” 라는 게 제일 고마웠던 것 같다. 그건 나의 아름다움의 소멸에 대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 정작 내가 예쁘지 않았어도 그것에 영향 받지 않고도 날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나에게 예쁘다고 하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깔려있는 것 같다. 문득 스쳐지나갔던 사람들 대다수가 그랬다.


그럼에도 여전히 혼자가 편한 이유는 누군가에 의존해서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라 여전히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내고 살아간다는 만족감이나 뿌듯함에 있는 것 같다.


엄마는 나를 괴물로 키웠지만, 정작 괴물이 된 나는 괴물의 나도 사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해나 용서 대신에 무시와 현존에서 답을 찾았다.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가 아니라 그냥 내 멋대로 멋지게 살아내고,

그녀를 용서해야지, 가 아니라, 과거를 흘려보내야지, 가 되었다. 언제나 현재를 살아야 하고 미래에 감사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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