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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잇 Nov 04. 2020

아홉

기억되는 감정들에 대하여





적당히. 인간을 좀 적당히 사랑할 수는 없나. 

때때로 사람은 예상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누군가에게 감정을 주기도 한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또 다르다. 애정일수도, 미움일수도, 혹은 애증일수도. 과한 감정은 제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이미 나의 영역을 벗어나 상대에게 도착해버려서. 아니, 정말 상대에게 도착하긴 한 걸까. 도대체 갈피를 잃은 그는 어디로 가버렸나. 나는 보냈으나, 받지 못했다면 어디로 유실되어버린 걸까. 반환되지 않는 수취인불명.


타인을 재단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늘상 말하곤 하지만, 타인과 타인 사이에는 광활한 우주가 존재하기에. 각자의 우주 속에서 서로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림자에 가려져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이고, 멀리서 스쳐지나가 알 수 있는 만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 사실을 금세 까먹곤 해서, 제멋대로 그림자의 크기를 규정하고, 형태를 단정하며, 꼭 내 우주 속에 머물러져 있는 존재로 생각해버리곤 한다.

바보 같아. 나도, 당신도. 그럼에도 인간을 또 다시 사랑하고야 마는 내가 조금 더.


시간이라는 건 무섭게도 빨라서, 벌써 차와 마음이 식어버리곤 한다. 싸늘해지는 차는 조금의 온기만으로 금세 데워지지만, 마음은 더하는 온도와 반비례라도 하는 듯 도무지 달아오르지 않는다. 차가움은 따뜻한 적 따윈 기억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떠오르는 따뜻한 기억으로 인해 더 차가워진다. 종잡을 수 없어서 어찌할 바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알지도 모르겠다. 마냥 갈피를 잡지 못하며 허우적댔던 시간들은 지나고, 이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많은 단념을 했으니까. 과거의 말들은 참 우스워지면서도, 서글퍼진다. 그런 감상을 느꼈던 것들이 생경해진다. 나의 고통은 희석된다. 그리고 지금 아는 것이 진리인양 떠들어댄다. 아니, 이 것 역시도 고통을 희석시키기 위한 처방일지도. 그게 참 안쓰럽다. 그건 여전히 과거의 감상에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그래 그렇다. 시간은 그저 시간일 뿐이다. 따뜻했던 기억들도, 차가웠던 마음들도 그냥 시간의 과정일 뿐. 드라마에서 나왔던 그 말처럼 시간은 아무 힘도 없어. 그게 참 다정하면서도, 잔인해. 그 다정함이 잔인해지고, 또 다시 어느 날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잔인해.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이 교차한 그 날의 어느 감정은 결국 돌이킬 수 없으나, 굳이 돌이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 날은 또 그 만큼의 감정으로, 기억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제 자리인지 아닌지는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될 테다. 우리는 결국 늘 망망대해를 부유하며 사는 것이다. 무수한 감정의 바다에서 부유하며 아주 조금씩 줄어들겠지. 언젠가 바닷물이 다 마르는 날이 온다면 비로소 그 사막에서야 나는 조의를 표할 수 있겠지, 피살당한 감정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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