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들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안목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이 나에게 부드럽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면 매력도가 떨어졌다. 지루했다. 그들은 'Friend Zone'으로 보내어 플라토닉한 친구로 분류했다. 그리고 매력적인 나쁜 남자들을 찾아 그들을 쫓아다녔다. 그들이 나를 좋아할까 전전긍긍하면서. 결국 그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으로 끝이 날 때마다 와인병을 들이키면서 속상해했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거야. 나를 진정으로 위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을뿐인데.'
안타깝게도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정신을 차렸는지 접촉하는 사람들의 성숙도가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이제는 반짝거리는 보석이 있는 화려한 하이힐보다, 편한 운동화가 더 좋아진 것이다.
불안와 우울, 외로움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했던 20대와는 달리, 이제는 누군가가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결혼할 생각이나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으니 연애는 필수가 아닌 옵션이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없어젔고, 나를 매력적으로 꾸밀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날 것의 나를 그대로 받아주는 상대가 없다면, 차라리 나 혼자 있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마지막 연애가 흐지부지 끝난 이후, 3년동안 싱글로 지냈다. 마침 코로나가 터져서 솔로로 지내기에도 한성맞춤이였다. 항상 셰어하우스에서 살던 나는 처음으로 독립하여 나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꽤 평온하고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가끔씩 외로움 및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는 했지만 클라이밍, 등산, 캠핑에 빠져 바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런던에 살 때는, 그래도 새로운 도시에 왔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다시 데이팅 앱을 깔아 여러 이성들을 만나보기는 했다. 다들 무난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매번 만나서 똑같이 내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겨워서 데이팅 앱은 곧 지워버렸다.
베를린, 2023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얼굴을 못 본 한 친구를 보러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그와 나는 8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사이로, 자주 캠핑 및 여행을 같이 다녔었다. 내가 미국을 떠난 이후, 우리는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꾸준히 이메일 및 왓츠앱으로 연락을 유지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그동안 방황을 하고 정신 질환으로 마음 고생을 한 경험이 있어 서로를 잘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친한 친구일뿐 그 이상은 아니였다.
3월의 베를린은 서늘하고 우중중했다. 섹시하고 쿨한 도시라는데 베를린의 첫 인상은 그닥 별로였다. 하지만 그를 볼 수 있다면 장소는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금요일 오후에 만나 주말을 함께하는 일정이었는데, 완전한 암흑 상태에서 식사를 하는 'Dark Dinner' 뺴고는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런지 너무나 피곤했다. 주변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그를 기다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그가 호텔 방에 들어왔다. 눈이 부신 캘리포니아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그를 껴안고, 다정한 그의 체온을 느꼈다. 6년 만의 재회였다. 내심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가 사온 초콜렛과 과일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달콤쌉사름한 초콜렛 조각이 하나씩 입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그는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동안 긴 시간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하지만 난 두려웠다. 불안정한 연애의 영역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를 안전지대에 머물게하고 싶었다. 기대도 없지만 상처도 없는 안전한 친구의 영역에 계속 있게 하고 싶었다.
"난... 우리의 우정이 깨질까봐 두려워."
"걱정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꺼야."
우리의 트윈 베드는 더블 베드가 되었고, 우린 손을 잡고 베를린 도심을 걸었다. 때때로 그는 길을 멈추고 나에게 길고 느린 키스를 했다. 그리고 사랑이 담긴 눈길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정말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맞나? 베를린에서의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한여름밤의 꿈처럼 짜릿하고 달콤하면서도 영 종잡을 수 없는 안개같은 베를린에서의 3일이 끝난 후 난 런던으로,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