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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Nov 19. 2019

열다섯 번째날, 다시 기다림

구월 십칠일, 이천열여덟년

  한동안은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쓴다는 것은 곧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인데 내 생각의 먹구름 같은 일기예보를 반길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모든 생각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귀결됐기 때문에 내 시선에서 조차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누구도 궁금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아니 우중충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희망적이진 않아도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자신 없었다. 


  여전히 나는 세 번째 시험관이 처참하게 끝난 그 트라우마의 시간에 갇혀 살고 있었다. 입으로는 놓았다고, 비웠다고 말하면서 내 속은 가슴이고 머리고 온통 미련과 집착이 한데 엉켜 길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는 시간은 현재도, 미래도 그렇다고 과거도 아니었다. 트라우마라는 감정 공간에 식물처럼 뿌리를 내리고 점점 깊숙한 우울 속으로만 뻗어가고 있었다. 과거를 현재처럼 살고 현재는 어디 화성이나 금성쯤 되는 또 다른 행성과 같았다. 가까운 듯 멀고 먼 아득한 그런 다른 행성. 

  미래라는 것도 그랬다. 아이 없는 미래를 상상한 적 없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은 곧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래가 없는 오늘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사는 시간을 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흑백의 과거도 빛바랜 과거에도 명암은 존재했기 때문에 어떤 날은 지독한 회색, 어떤 날은 엷은 회색이었다. 희로애락에서 희와 락이 빠진 세상, 점점 커지는 로(노여움)와 짙어졌다 옅어졌다 하는 애(슬픔)의 색이 있는 세상, 그곳이 내가 사는 오늘이었다. 미련하게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다만 감정에 잠식당한 이성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에 역부족이었다. 


  흑백이 가진 명암까지 점점 하나의 색으로 짙어졌을 때, 누군가 내가 사는 오늘을 웅켜집더니 한 번에 뽑아 버렸다. 통째로 뽑힌 나의 오늘, 그 뿌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흙더미는 미련뿐인 과거의 시간이었고 버리지 못한 바람이었다. 남편은 나의 오늘을 세차게 흔들어 묵은 흙들을 털어냈다. 

  아프다고, 너무 갑자기 정신없게 흔들지 말라고 울며 화냈지만 들은 척 않고 흙들을 털어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알갱이들을 남편은 손수 하나하나 털어내기 시작했다. 행여나 여린 뿌리들이 다칠까 조심조심 남편은 흙들을 털어주었다. 


여보. 우리가 지나온 시간 중에 아무것도 헛된 것은 없어. 다만, 그 아픈 시간도 내 일부라고 굳이 품고 사는 것만큼 덧없는 것도 없어. 우리 이제 그만 털어버리자.



  건강하고 따뜻한 남편의 마음이 내게로 왔던 날, 그의 맑은 숨들이 바짝 타들어가 텅 비어버린 내 껍데기를 가득 채워 깨우더니 일으켜 세웠다. 우울하기만 하고 무섭기만 했던 네 번째 시술을 남편 덕분에 무사히 끝냈다. 네 번째 시작을 시작하면서도 우리의 목표는 이식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것이었고 애초에 임신까지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그래서 이식하는 날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우린 의아했다. 독일에선 미리 전화로 수정란의 상태를 알려주는데, 한국에서는 이식 당일날까지도 아무 말이 없어서 병원으로 향하면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이식도 못할 텐데 굳이 병원까지 가서 그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다. 


  생각보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마주 앉은 간호사가 내게 불쑥 서류를 내밀었다. 이식에 관한 안내문과 사인을 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당연히 이식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우리는 서로 한 번 마주 보고 간호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이식해요?

  

그때 간호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뭐, 이렇게 당연한 질문을 저렇게 안 당연하게 물어보나 하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이식할 거니 서류에 서명부터 하자는 간호사 말을 너무도 분명히 듣고도 나는 두 번, 세 번 더 물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식할 거라는 그 말을 나는 끝까지 듣지도 못하고 오열했다. 


"저기요, 임신이 아니고 이식인데.."


  간호사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네 번째 시술인데 처음 이식하는 거라고 충분히 기쁘다며 엉엉 울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이없게 나를 보았다. 육안으로 보기도 힘든 작은 세포라도 내 안에 품을 수 있다는 그 기쁨이 일단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 날, 한국까지 가서야 처음으로 3일 배양된 중상급의 배아를 이식했다. 


  첫 번째 시술에서 7개를 채취하고 6개를 미세 수정시켰지만 모두 분열 실패, 두 번째 시술에서 열흘 가까이 주사를 맞아도 난포가 한 개만 자라서 두 번째는 채취도 실패, 세 번째 시술에서 첫 번째 시술보다 주사 용량을 모두 두배로 늘리고 기간도 늘렸지만, 난포 4개를 채취했고 4개 모두 다시 미세 수정시켰지만 역시 전부 분열 실패. 그렇게 세 번의 시술 동안 이식까지 한 번 가보지도 못했는데, 3점대의 Amh 수치는 0점대까지 바닥을 쳤다. 벌써 작년 겨울이야기다. 한국에서 네 번째 시도에 난포 수는 더 줄어 세 개를 채취했고 그중에 단 하나의 배아가 세포 분열에 성공했다. 시험관 4차 만에 처음으로 하나의 배아를 이식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이식이었기에 이식한 후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실패를 염두에 두고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던 터라, 티켓 변경도 해야 했다. 이식 후의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험관 4차가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던 터라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식 후를 대비한 것도 없었다. 얼떨결에 이식했고 그저 1차 피검을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처음으로 1차 피검을 기다렸던 그 시간은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지나온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이식을 하고 보니 바람과 욕심도 자꾸 커져만 갔다.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어렵게 이식했는데 아이가 와줬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바라게 됐다. 그 사이에 남편의 비행기 티켓은 연장하지 못해 원래 일정대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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