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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Nov 19. 2019

열일곱번째날, 30초 만에 행복해지는 법

삼월이십육일, 이천십구년.  (부제: 30초 만에 불행해지는 법)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왔던 평범한 삶이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보통 다수의 사람들처럼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사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살면서 큰 욕심을 부릴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맛있는 음식 한 개 더 먹고 싶은 정도였다. 승부욕도 별로 없었고 바라는 것도 딱히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했고 다음엔 정말 시도를 해볼지 숙고했다. 일단 결정을 하면 이룰 때까지 미련할 정도로 무던하게 노력했다.


  적당히 어려운 목표를 세우되, 너무 큰 목표를 세워 스스로 스트레스로 내몰고 다급하게 살지 않았다. 천천히 조금 늦더라도 원하는 바를 하나씩 이루며 살았다. 가끔은 나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바라보거나 내게 넘치는 것을 꿈꾼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지며 적당히 타협했다. 나름대로 너무 치열하지 않게, 너무 아등바등 살지 않으려 했다.


  적당한 것이 평범한 것이고 다수가 사는 시간이 평범한 삶이라 여겼다. 내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던 것은 가족이나 환경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결혼이 처음이었다. 결혼은 두 개의 인생이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결혼이 늦어지면서 가끔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남다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편을 만나 독일로 넘어오면서도 그랬고, 처음 시험관을 시작하고 첫 시험관이 끝났을 때만 해도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드라마틱한 결과가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서 무언가 크게 어긋나 있다고 느꼈다. 뭐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양발이 모두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에게 닿는 아이의 인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니 오늘도, 매일, 내가 나에게 받아들이라고 닦달하고 종용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잘 지내는데도 언젠가부터 나는 늘 불행했다. 누군가는 겨우 아이 때문에 그런다고 한심해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게 체념이 안되냐고 답답해했다. 그 누군가 보다 더, 그 어떤 이 보다 더, 답답한 사람은 나였다. 빛이 없는 시간을 그냥 버텨오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불행하지?


  내 불행에 대한 자문자답을 하다 보니 꽤 단순한 결과에 이르렀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슬픔,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 바람이 욕망이 되어버린 분노, 모두가 다 가진 -어떤 이는 스스로 포기하고 또 어떤 이는 쉽게 얻어 소중함을 모르는- 그래서 당연한 것이 내겐 커다란 욕심이 되어버린 억울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슬픔, 분노와 억울함을 느낀 대상은 무엇인가? 보통 평범한 다른 사람들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비슷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내가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다수가 누리는 것이 평범한 것이다.

누가 기준을 정했는가? 사실 기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내 생각이었다.  

나? 끝이 없을 것 같던 질문은 다시 내게로 돌아와서 끝이 났다. 애초에 시작과 기준이 오류였다. 보이는 삶과 사는 삶의 차이도 알 수 없었다. 슬픔은 상대적이라면서 행복은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평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흘려듣던 라디오에서 한 문장이 귀에 박혔다. 30초 만에 불행해지는 법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것과 나를 비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30초 안에 불행해진단다.

원하지만 내게는 없는 것일 때, 또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지만 가지게 될 확률이 희박할수록 더 빠르게 불행해질 수 있다.


     누구도 처음부터 타인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 나와 타인을 작정하고 비교하진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보게 되거나 길을 지나다 문득 마주친다. 내가 원했던 던 어떤 것. 그러나 지금 내게는 없는 것. 내가 가지고 싶지만, 나는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마주하는 순간, 부러운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때때로 그 마음이 확장되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도달하는데 30초면 충분하다 이론이었다.


  비교는 무의식에서 자각 없이 비롯되지만 습관이 되기 쉽다. 비교가 습관이 되면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많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하는 비교를 피할 수 없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 끝에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불행해지는 것이 그렇게 쉽다면 반대로 행복해지는 것도 30초 안에 못할 게 아니지 않은가!





  남편과 나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아이에 관한 일이 있고 한동안은 각자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네 번째 시험관이 끝나고 남편 덕분에 내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야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곧 아주 단념하는 날도 올 것 같다.


  요즘 우리는 우리에게 전환점이 되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첫인상이나 그때 왜 울었냐든가, 언제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해졌는지 등등, 어떤 하루가 우리 관계에 전환점이었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날은 역시 루고.

루고 가는 길.. 벌써 8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단연 루고에서 이틀 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다면서, 그날 이틀 묵어간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요즘 우리는 처음 만난 연인들처럼 더욱 서로를 배우고 있다.




여보! 당신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어?
특별히 없는데..
굳이 하나 말하라고 한다면, 그냥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내가 당신을, 그리고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 사랑했으면 좋겠어.   


 네 번째 시험관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와서 그와 나눈 이야기였다.

나는 요즘 부쩍 다시 질문이 늘었다. 처음 그를 만나고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붓던 때처럼 요즘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말속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온도가 좋다. 말이 전하는 마음의 온도를 느끼고 싶어서 자꾸 남편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그는 매일 발전하고 성숙하는데 나만 여전히 내 슬픔에 갇혀 그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신이 우리에게 다시 기적의 한 수를 주지 않을까.. 아니 줬으면 하는 미련까지는 차마 버리지 못했다. 오지 않을걸 알면서도..


나는 참 잘 단념하는 사람인데..

내게 욕심이다 싶은 건 금방 잘 놓는데..

이것만큼은 잘 안된다..

내가 욕심낸다는 생각보다 왜 나일까.. 하는 억울함이 아직은 더 큰 것 같다.


가끔은 그와 함께 걸었던 루고 가는 길, 그 날의 아스팔트가 떠오른다.

북쪽 길엔 유난히 많았던 아스팔트였지만 그 날은 특히나 고된 하루였다.

그렇지만 우린 루고로 가는 그 날 부쩍 더 가까워졌다.


우리 힘든 시간도 우리를 더 가깝게 하는 것 같다.  

더욱 서로에게 집중하고 더 배우고.

왜 내게 그인지..

왜 그에게 나인지..

왜 우리는 함께인지..


남편은 항상 현재에 충실하다. 오늘도 아니고 지금. 바로 지금 말이다. 배고프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피곤하다가 누웠을 때, 가지고 싶은 것을 얻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외에도 남편은 하루에도 여러 번 행복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보는 시선을 거두어 내게로 돌리고, 오늘내일이 아니라 지금  내가 당장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면 수시로 행복해진다.


30초 만에 행복해지는 것.

그것은 매우 단순했다.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잘 지나가고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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