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Jun 28. 2020

정지돈처럼 쓰기

* 존칭 생략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존경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하다. 그런 건 따라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어딜 감히. 어제 그의 책 <영화와 시>를 사서 읽다가 (책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서) 잠에 들까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다 읽고 잠에 들었다. 카페에 있는 지금 테이블 위에 그 책이 올려져 있다(카페 소유). 정지돈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진 않진 않는다. 괴로움만 가중시키는 일이다. 그러다가 어제는 문득 정지돈처럼 쓴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역사적인 인물의 말과 역사적인 사건을 자주 인용하고, 주변의 친한 사람의 아무 일화나 가져다가 써버리고, 본의 얘기에선 자학에 빠지는 것 같다가도 당당하게 쓰면 되나, 같은 생각을 했다. 설령 그의 글과 매우 비슷하게 썼다고 해도 모두가 그렇게 느낄까. 정지돈 본인이 읽고 나서 내가 쓴 것 같다고 하면 되는 것일까.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성대모사를 하듯이, 작가들은 술집이나 카페에서 만나 서로의 문체를 흉내내면서 놀고 있지는 않을까. 본인들만 알면서 좋아하고 웃을 수 있는 놀이라서 더 재미있게 하겠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판단하기 위해 앨런 튜링은 튜링 테스트라는 것을 고안했다. (본인이 이름을 짓진 않았겠지) 테스터는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대화가 끝난 후에 상대방이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맞추면 된다. 컴퓨터를 인간으로 판단한 비율이 어떤 기준을 넘어가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유사하게 튜링 정지돈 테스트라는 것을 해보자. 테스터는 내가 쓴 글과 정지돈이 쓴 글을 무작위로 받고 어떤 글이 정지돈의 글인지 판단한다. 여기서 테스터 집단을 잘 설정하지 않으면, 정지돈 본인마저 본인의 글을 인정받지 못하는 수가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지돈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지돈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렇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작가란 무엇이며 작가의 글은 어때야 하며 정지돈의 글은 작가의 글이 맞지만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역시나 결과는 엉망일 것이다. 테스터를 정지돈의 책을 한 권 이상 완독한 사람으로 한정지어보자. 이러면 얼추 예상하는 결과가 나올 것 같은가. 아니 역시 그렇지 않다. 정지돈의 책을 무려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정지돈의 글과 나의 글을 정확히 구분해내겠지만, 멀쩡한 초코첵스를 놔두고 파맛첵스에 투표했던 16년 전 네티즌의 마음으로 정반대로 결과를 입력할 것이다. 그 마음은 ‘망해봐라’와 유사하거나, 일반인의 글 따위와 비교를 당하고 있는 정지돈을 애처로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테스트는 정지돈의 다음 글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런 테스트는 불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정지돈의 글과 나의 글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지돈처럼 쓰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저녁이 되었는데도 기억하고 있는 게 용하다.


그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다 읽은 책도 있고,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 책도 있고, 두어 장 읽고 포기한 책도 있다. <Analrealism Vol.1>은 읽으라고 만든 책인지 약간 의심스럽다. 다 읽은 사람이 있을지, 있다면 몇 명이나 있을지도 궁금하다. 겉은 매우 번지르르하고 제목도 ‘인스타각’이 나오는 것이 책꽂이에 꽂아두기는 아주 좋다. 초록색 계열 표지로 Vol.2가 나오면 좋을 것 같다. 역시 읽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많이 읽은 건 <건축이냐 혁명이냐>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다시 읽어볼까 싶기도 하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두 번 정도 읽은 상태에서 인문대 친구 만났는데, 이 친구가 웃으면서 그건 연애 얘기라고 해서 다시 읽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연애 얘기가 아닌데. 연애가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닌데. 그래서 자주 만나지 않는 사이임에도 굳이 메시지를 보내 이게 어디가 연애냐고 물어봤다.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는 영역 싸움”이라고 나오는 부분까지 읽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로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내 마음 속에서 연애 소설이 되었다. 어떻게 잘 생각해보면 연애 얘기 같기도 하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떻게 글을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어제 본 책의 마지막에 언급된 영화 <인셉션>에 대해 얘기를 하고 마쳐야겠다. 이 영화를 본 것은 분명한데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매체를 통해 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끝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옆에 있던 친구(누군지 모르겠다)에게 물어본 기억이 있다. 대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가님(급존칭)이 구리다고 한 부분이 그 부분인 것 같다. 다시 보진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당근 씨의 어젯밤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