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Mar 01. 2022

스타트업 4행시

<언캐니 밸리>를 읽고

잘 나간다는 대기업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정말 잘 나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작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스타트업에 가겠다고 퇴사를 선언했다. 연말까지 근무를 하고 남은 휴가를 사용했다. 오늘은 휴가의 마지막 날이고, 퇴사일이기도 하다. 


휴가가 시작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사람들을 만나서는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나의 퇴사와 입사에 대해서. 가끔은 내가 한 자리에서 같은 말을 두 번씩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나는 곳은 주로 만나는 사람의 직장 주변으로 정하고, 가급적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났다. 그 사람의 직업과 직장에 대한 얘기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는 느낌이었다.


영어 학원을 등록했다. 강좌명에 Start-up이 들어가 있는 강의를 골랐다. 입문반이었다. 그냥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가볍게 다닐 수 있는 반을 고른 건 아니고, 내 수준이 그랬다. 아니 그렇더라고, 난 아닐 줄 알았지. 평일 낮에 영어학원을 다니는 직장인이라니. 나와 선생님을 제외하면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선생님이 칠판에서 between jobs 라는 표현을 적어주셨다.


넷플릭스에서 미국 드라마 <스타트업>을 보기 시작했다. 중도하차했는데, 꿈과 희망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짓밟히고 다시 어떻게 좀 해볼까 싶으면 다른 일이 터져서 너무 힘들었다. 주인공들의 희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는 폭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어쩜 이렇게 극단적일까 싶었지만, 돌아보니, 아, 그런 게, 스.타.트.업.이구나, 싶다. 맞네 맞아. 지금이라도 이어서 볼까? 아니. 내 인생이 드라마인데 뭐하러 드라마를 봐요.


과거에 잠시 스타트업에 잠시 몸 담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들어간 곳은 육지에서 떠난 지 한참된 배 위였다. 배는 이미 수많은 풍파를 겪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에게 자리를 주긴 했지만 역할을 주진 않았다. 배에 올라탔을 때는 이미 목적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배는 곧 다른 이에게 인수될 예정이었다. 인수와 동시에 배는 폐기되었고 나를 포함한 선원들은 큰 배로 옮겨졌다. 스타트업에 다녀봤다고 말을 할 때도 있다. 가벼운 농담으로써 혹은 면접에서. 하지만 스타트업에서 일을 해봤다고 말을 하진 않는다.


2주 정도 지나고 나니, 내가 원래 직장인이었나, 싶었다. 나는 그냥 친구들 만나고, 영어학원 다니는 사람 아닌가. 집안일을 제외하면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새 직장을 다니기 위한 예습은 살짝 뒤로 미뤄두었다.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쪼끔만 더 놀구요, 설 지나면 할게요.


그러다 5주차에 사건이 터졌다. 내가 올라타기로 한 배가 공격을 당하고 순식간에 가라 앉았다. 설명에는 Exploit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그래도 어떻게 잘 틀어막으면 배가 다시 뜨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내가 탈 자리가 없어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그렇게 휴가가 끝났다. 너무 열심히 놀아서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정신 공격이 들어오자 그대로 퍼졌다. 휴가는 한 달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다, 구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잖아!' 다행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휴가는 반토막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휴가가 반토막이 된 건 너무 억울하다. 영어학원은 등록을 취소했다. 구직을 시작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또 누군가 너덜너덜해진 배를 사갔다. 이번에도 배는 버리고 사람만 챙겨갔다. 다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을 했지만 나로써는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다시 큰 배에 타게 되었다. 전보다는 작은 배지만 최근 기세가 나쁘지는 않다(고들 한다). 올해는 바쁠 것 같다.


이번에 스타트업에 간다고 했을 때 많이 받은 질문은 '지분'을 얼마나 받았냐는 것이다. 사실 몰라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가면 어련히 알아서 챙겨들 놓으셨겠거니 했다. 세상에 어련히 알아서 챙겨주는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앞으로는 잘 챙기도록 하자.


<언캐니 밸리>의 감상은 이렇다. '출판 노동자가 스타트업을 전전하다 결국 작가가 되었구나!' 저자가 결국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 그가 스타트업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은 내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저자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남았다면 감상이 조금은 달랐을 것 같다.


'스타트업 4행시'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