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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Dec 30. 2021

출산 64일 차 일기

카페에서 쓰는 일기

2021년 12월 30일 목요일 날씨 눈


오랜만에 쓰는 일기이다. 오늘은 감격적 이게도 집이 아닌 집 근처 카페에서 쓰는 일기이다. 카페에서 쓴다는 것은 카페에 왔다는 것이고, 카페에 왔다는 것은 집 밖을 나왔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걸리는 이 카페에 오기까지 몇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지난 월요일 한 달여 만에 방문한 ㅎ정형외과. 대학 수능 결과를 확인할 때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예약시스템에도 1시간가량 대기를 해서 만난 지역의 고관절 명의로 알려진 ㅎ정형외과 부원장은 내 엑스레이를 보고 감탄인지 탄신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아..."

불안한 분위기의 BGM  

"..(뜸 들이곤).. 좋아졌네요. 내가 좋아진댔죠?" 

 

ㅎ정형외과 부원장은 초기 진료에서 내게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했고, 회복기간을 묻는 질문에 (이 역시 뜸을 들이곤) "..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던 적 있었다. 이후 진단서를 끊을 때 "내가 언제 6개월이라고 했냐"라고 발뺌을 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야호!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 

 

나는 출산 후 임신 때부터 좋지 않던 다리 불편함으로 찾은 병원에서 '임신으로 인한 일과성 골다공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이후 두어 달간 육아는 물론 집안일에 관여할 수 없었고, 물론 내 몸을 돌보는 것에도 관여할 수 없었다. 고백하자면 임신 막달부터 지금까지 난 샤워를 할 때 발바닥을 씻을 수 없었다. 발바닥을 씻기 위한 움직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발바닥을 씻기 위해서는 한쪽 다리를 들고 다른 다리로 무게를 지탱한 뒤 샤워볼로 발바닥을 문질러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 발을 씻는 분이 있는지?)   

 

아직까진 발바닥을 속 시원하게 씻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역의 고관절 명의인 ㅎ정형외과 부원장의 명쾌한 진단(좋아졌네요. 내가 좋아진댔죠?)에 의하면 몇 달 안에는 씻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발바닥이 깨끗해질 날이 된다면 육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품 안에 우는 딸 마리를 안고 재울 수 있지 않을까? 

 

다 같이 박수. 짝짝짝.  

 

병원을 다녀온 후 난 작은 집안일부터 시작했다. 설거지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세탁기 돌리는 일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역시 행복은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남편 바리는 육아, 집안일, 아내 간병 쓰리콤보의 강행군을 펼쳐왔다. 그의 일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감사하다. 무교이지만, 신에게도 감사드린다.  

 

실은 일기를 쓰지 않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60일밖에 안된 마리의 병원행으로 눈물 콧물을 쏟은 일이 있었고, 아픈 남편 바리를 보며 눈물 콧물을 쏟은 일도 있었다. 그건 다음 일기 때 다시 회상하는 걸로. 

그러니 지금의 난 오랜만에 가요가 나오는 카페에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카페인이 듬뿍 들어간 따뜻한 카페라테 라지 사이즈 커피를 마셔볼 참이다.

(그동안 카페인이 약 흡수를 방해한다는 말에 디카페인 커피를 마셔온 탓에 커피를 주문을 할 때도 '카페인 카페라테로, 따뜻한 걸로, 큰 사이즈로 주세요'라고 했다. 오랜만의 외출 방역 QR코드를 찍는 것도 몰라 허둥지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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