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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맥타 Apr 06. 2020

스메타나 -  청력을 잃은 작곡가는 베토벤만이 아니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는 체코의 민족주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스메타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누구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싶으면, ‘몰다우’라는 독일어 제목으로 더 유명한 교향시 ‘블타바’(Vltava)를 들어보면 된다. 


스메타나, <나의 조국> 중 ‘블타바’


‘블타바’의 선율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 비하면 스메타나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인물에 비하면 말이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가 40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체코어를 익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베드르지흐라는 이름만큼이나 낯설다.* 스메타나가 청력을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청력을 잃은 채로 작곡을 계속했다는 것 역시 익히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스메타나의 음악이 주로 ‘스메타나는 곧 민족주의 작곡가’라는 공식대로 소비된 탓도 있을 테고, 청력 상실 이후에도 음악 양식에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청 작곡가의 상징인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다. 난청이나 청력 상실을 경험한 다른 작곡가들의 이야기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


1874년, 당시 만 50세였던 스메타나는 체코 임시극장**의 지휘자로, 그리고 체코 음악계의 주요 인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처음으로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해 7월 2일이었다. 여러 종류의 고음이 들렸고 때로는 “마치 강렬한 폭포수 근처에 서 있는 것처럼” 요란한 소음이 들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오른쪽 귀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왼쪽 귀의 청력마저 잃었다.


갑작스러운 청력 상실로 더 이상 지휘를 할 수 없게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진 스메타나는 1876년 6월에 프라하를 떠나 야브케니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큰딸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메타나는 계속해서 작품을 썼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명이 시작되고 급속도로 청력을 상실한 1874년부터 약 5년의 시간이 스메타나 최고의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스메타나의 대표작 <나의 조국>(1872~1879)을 비롯해 <체코 무곡집 1권>(1877)과 <체코 무곡집 2권>(1879), 오페라 <키스>(1876)와 <비밀>(1878), 그리고 <현악사중주 1번>(1876)이 있다.


“그의 가장 성숙하고 강렬한 작품 중 일부가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창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작곡가 알렉산더 매켄지


청력 상실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현악사중주 1번>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나의 생애로부터’라는 부제가 붙은 <현악사중주 1번>은 그간의 삶을 회고하는 자전적 작품이다. 스메타나는 이 작품 안에 7월에 들었던 이명을 담았다. 마지막 악장의 중반부를 지날 무렵, 빠른 템포의 활기찬 음악이 돌연 중단되고,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서 연주되는 저음의 트레몰로 위로 제1 바이올린의 아주 높은 E음이 등장한다. 그리고 음악은 처음의 분위기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울하게 끝맺는다. 스메타나는 이 음이 1874년에 들었던 이명이라고 직접 밝혔고, 이것이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표현하기 때문에 반드시 포르티시모로 연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작품에서 이렇게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정도로 청력 상실은 스메타나에게 중대한 사건이었고, 재앙이라고 부를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스메타나, <현악사중주 1번>  4악장 '비바체'


1880년대에 들어서는 작곡 과정이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기억력 감퇴로 조금 전에 떠올렸던 음도 금세 잊어버렸고 장시간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다. 곡을 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하루 종일 몇 마디밖에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건강이 악화된 스메타나에게 의사들은 작곡을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스메타나는 계속해서 곡을 썼고, 그의 두 번째 현악사중주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현악사중주 2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말년에 찾아온 정신질환의 영향으로 음악적 흐름이 지나치게 분절되어 있고 일관성이 없다고 평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악사중주 1번>과 같은 자전적 작품으로 해석한다. <현악사중주 1번>처럼 각 악장이 특정한 사건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청력 상실 이후 스메타나가 살아간 암울한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이 곡이 “첫 번째 현악사중주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한다”고 한 스메타나의 언급이다. 스메타나 전기를 쓴 즈데녜크 네예들리는 <현악사중주 1번>이 스메타나의 어린 시절부터 청력 손실이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묘사하고 <현악사중주 2번>은 이 시기 이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스메타나가 정신 질환을 얻어 이듬해에 프라하의 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주장만 받아들이기는 조심스럽다. 이 시기에 작업했으나 결국 미완으로 남은 오페라 <비올라>의 경우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는 악보들에 등장인물을 혼동한 흔적과 일관성 없는 낙서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스메타나가 남긴 흔적들로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정신마저 희미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작곡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스메타나는 기억력 감퇴와 집중력 저하로 작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곡을 쓰고 싶고, 어쩌면 분투 끝에 승리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악사중주 2번>이 분투 끝에 거둔 승리였는지, 청력 상실과 정신 질환을 이겨내지 못한 실패작인지는 듣는 이에 따라 판단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뜻한 바대로 계속해서 나아간 것만으로도 그의 승리를 인정받기에 충분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스메타나, <현악사중주 2번>



*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하에 있던 보헤미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스메타나는 어린 시절부터 독일어로 교육받고 일상에서도 공용어인 독일어를 사용했다. 


** 체코 국립극장 개관 전까지 그 역할을 대신한 극장. 1881년에 체코 국립극장이 개관하면서 임시극장의 건물은 국립극장에 통합되었다. 




아이디어를 주신 김지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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