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의summer Apr 08. 2022

어린이집 입학 다섯째 날.

나를 키우는 육아

내가 복직을 하면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 생길 유사시를 대비하여 유급휴가를 12일 치나 쓰고 있지만) 에바가 어린이집에 정식 입학했다.

코로나라 세리머니 없는 입학식도 있었는데 어쨌든 입학식까지 포함하면 오늘로 벌써 일주일째다.

시간제로 이미 다녀봤던 곳이었고 시간제반에서는 너무나 따뜻한 선생님들이었던지라 이 어린이집에 붙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낯가림이 조금 있는 딸이 그나마 적응이 빠르지 않을까 내심 안도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식 반편성이 되면서 선생님도, 친구들도, 공간도 바뀌다 보니 딸아이에게는 어쨌든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바뀐 것과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다.


어린이집 적응기간(: 나라시보육, 慣らし保育)동안은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담당(=악역)은 남편이 자처했었는데 어제저녁 남편의 퇴근이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받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내 휴대폰에 뜬 남편의 프로필 사진을 본 딸이 "아빠 싫어! OO할머니한테 전화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지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딸을 억지로 떼어놓고 뒤돌아서서 나오는 아빠가 어지간히 미웠었나 보다. 그날 밤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들어왔지만, 그런 아빠를 물그러미 보던 딸의 첫마디는

"아빠는 돈 벌러 가"였다.


난 그저 예상치 못한 딸의 반응에 빵 터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럴 땐 정말 내 딸의 어휘력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남편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슬픈 눈을 하고 있다. 아아 가장으로서 힘 빠지는 순간이려나. 일방적인 악역을 맡기는 것도 미안해서 앞으로는 내가 악역을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세상 가슴 찢어지는 역할이었을 줄이야. 픽업갔을때도 나를 발견하면 1미터 밖에서부터 환한 얼굴로 달려와 폭 안겨 '엄마 보고싶어또'라고 10번 속삭여주는 딸의 마음에 뭉클했던 나인데. 데려다주는 건, 비교할수 없을만큼 가슴아픈 역할이었다.



아침. 현관을 나설 때부터 반항은 심상치 않다.

아니, 원래도 한창 미운 세 살(terrible 2)이었던지라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보내는 엄마인지라 최대한 차분하게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어 조용히 찬장에서 영양제 구미를 꺼냈다.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의 역할 말고도 많은 역할이 있어. 그중에 하나가 회사에 가서 일을 하는 건데 그 경제적 활동을 통해 우리 가족을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어. 그래서..."


결국 엄마 아빠 역할도 더 잘할 수 있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고, 잘 따라와 주는 너에게는 참 고맙다고 최대한 설명하려 노력했다. 딸이 다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너에게도 힘든 과정일 테니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힘나는 마법의 젤리를 주겠다고, 그렇게 영양제를 쥐어주었다.

그런데도 에바는 그 달콤한 젤리를 어린이집 가는 동안 한참이나 쥐고 있기만 할 뿐, 먹지는 않았다.


드디어 들어선 어린이집 2세 자두반 교실.


떨어지지 않는다. 내 품에 포옥 안겨,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그저 내 두 팔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딸을 억지로 떨어뜨리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너에게 마음의 부담을 안겨주는 만큼 엄마 아빠도 열심히 살겠노라 딸에게 다짐했다.

기분 좋은 메모리폼 매트리스 같이 안겨있는 딸의 품을, 나도 놓기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 교실 앞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애틋한 모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딸아이를 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눈을 마주치려 해도 딸은 내 눈을 보지 않는다. 선생님께 넘겨드릴 때도 선생님 품에 마지못해 안겨있는 순간에도 딸은 끝까지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게 아닌가.


아...!

얼굴이 시뻘게질 대로 시뻘게진 우리 딸이 그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설움을 참고 있다. 엄마랑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터질까 봐, 울어버리면 엄마가 힘들어질까 봐 참고 있는 걸까. 보채고 떼쓸 때마다 "에바가 울면 엄마는 힘들어"라고 했던 나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고작 두 돌 지난 아이를 인내하게 만든 것일까. 그녀의 성숙함에 너무나 당혹스럽고 가슴이 저려왔다.

 

"에바야, 괜찮아 울어도 돼"

선생님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우리 둘만의 언어로 말해주었다. 그제야 나를 똑바로 보며 울음을 터트리는 나의 딸.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는 딸에게 애써 웃음을 보이고 나오는 데 내 눈에서도 주책맞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이럴 땐 마스크를 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랬으면 담백한 일본 엄마들 사이에서 짧은 작별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극성 한국인 엄마가 될 뻔했다.


흔히 일하는 엄마들이 느끼는 죄책감이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와 같은 회의감 같은 감정은 아니다. 잘 자라준 아이에 대한 감사함. 늘 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만 궁금해했지 그 깊이는 헤아리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가늠하지 못할 만큼 빠르고 크고 깊게 자라나는 아이의 우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별 헤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