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리 Mar 27. 2023

친구, 혹은 관계의 유효기간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베프에게 절교당했다. 어제까지도 펍에 함께 앉아 기네스를 마시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던 친구가 <네가 이제 싫다며 오늘부터 말 걸지 마>라고 한다. 


절교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뛰게 생겼다. <도대체 왜?> 이럴 때,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며 <오케이, 그동안 즐거웠다. 또 보진 말자> 이렇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쿨 한 사람도, 쿨 할아버지가 와도 그렇게 돌아 설 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은 <왜>의 감옥에 갇혀, 그 간의 기억들을 수도 없이 리플레이하고,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을지 따져본다. 내 기억 속 '우리의 모습'은 그저 똑같이 웃고 떠드는 지극히 평범한 어제와 같은 오늘이건만, 


왜 때문에 지금 너는 내 삶에서 떠나려고 하는가.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이 동네 소문난 베프 콜름과 파우릭.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는 콜름이 파우릭에게 돌연 절교를 선언하며 시작된다. 


즐길 거리라고는 펍에 나와 맥주 한잔 마시며 몇 시간 웃고 떠드는 일 밖에 없는 아일랜드의 작은 섬 마을. 나이가 더 많은 친구 콜름은 삶의 허무함 속에 빠져버렸다. 지루하리 만치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 반복되는 일상. 지적 자극이 전혀 없는 시답지 않은 농담만 하는 친구 파우릭과의 시간.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맞이하게 될 죽음. 


<그렇다면 내 인생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인가...> 먼저 늙어가고 있는 콜름에게 실존주의적 조급증이 몰려왔다. 


아일랜드에는 한창 내전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 섬마을은 평화롭다. 고립된 섬, 한 없이 펼쳐진 바다, 드 넓은 초원, 때때로 내리는 비와 가끔 고개를 내미는 햇살, 오후 2시가 되면 일과가 끝나는 사람들, 남의 편지까지 뜯어보는 모두가 모두의 사정을 아는 작은 마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의 따듯한 '인심'과 '정'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숨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폐쇄된 공간이다.  


나도 가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 또 내 소중한 4시간을 태워버렸군>이라며 허탈해질 때도 있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넷플릭스나 보고 앉아 있었겠지만, 괜찮은 영화를 보는 것이 지루한 인간과의 수다보다 훨씬 나을 것이었다. 


별일 없는 인생들이 <아무 일 없음>을 확인하는 그 일신의 사소함이 너무 지겨워,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 할 얘기라고는 자식 얘기 밖에 없는 옛 친구들과의 삶의 괴리감은 더 이상 매울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이고 무성의한 답변만으로 이 대화를 이어 가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이 관계를 끝내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될 때도 있다. 


애초부터 친구란 왜 필요한 것인가. 


영화를 보며 초반에는 콜름이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파우릭에게 <이제 그만 콜름을 내버려 둬>라고 얘기하고 싶어졌다. 


한 줌의 평화와 침묵을 원하는 친구를 파우릭은 왜 가만두질 못할까. 


파우릭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인간이고, 이 다정함은 자타공인 파우릭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그러나 그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둔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헤아리지 못한다. 한마디로 눈치 더럽게 없는 인간이다. 


콜름은 민속음악가이고, 생각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콜름은 예술을 말하며 모차르트를 들먹이지만, 몇 세기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파우릭과의 대화가 자신의 예술할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고 얘기하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콜름은 영원히 남겨질 "예술"을 만들고 싶어 하고, 파우릭은 "다정하고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추구하는 것이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한때 좋은 시간을 보냈고, 이 관계는 끝이 났다.   


둘 다 영화 끝까지 "예술"과 "다정함"이라는 자신들의 삶의 기조, 모토를 잘 지킨다.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집을 태우는 파국으로 끝이 나지만, 결국 그 둘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의 삶의 모토였다. 


아무리 베프라도, 친구라는 존재가 <나 자신>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파우릭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고, 그의 삶에는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았다. 


콜린 퍼렐이 그 빛나는 잘생김을 눈썹 뒤에 감추고, 오직 연기로 승부 본 영화. 베리 케오간은 <음침함, 쓸쓸함, 외로움> 같은 단어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은 그런 마스크를 지녔다. 그가 나올 때마다 움찔하게 된다. 마음 깊이 연민을 느끼지만 가까이 하기는 싫은 그런 인물이다. 21세기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감독 마틴 맥도나의 작품인데. 각본은 뭐 말할 필요도 없지. 어떻게 이렇게 잘 쓸까..... 부럽기만하다. 



상영관에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나올 때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는 뒤 쪽에 앉아 있다가 내가 나가려고 뒤를 보자 영화관을 급히 빠져나갔다. 


<나도 그래, 형씨.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겠지만 우린 친구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영화관을 나와 운동도 할 겸 집으로 1시간을 걸어왔다. 남은 인생,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고민했다. 10년 주기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다. 애초부터 나에겐 목숨을 바쳐도 될 만큼의 신념이란 것이 없다. 나는 작년부터 <다정함>의 근육을 키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앞으로 몇 년은 이 기조 아래 살아 볼 예정이지만 나의 <예민함>도 더 갈고닦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에서 나와 밤 길을 천천히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었다. 

예상대로 혼자였다. 별일 없이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