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원 Apr 10. 2021

안 읽을 거 알아요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싫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뒤따라 오는 질문. "그럼 너는 솔직한 사람이야?" 20대 때 나였다면, '그렇다' 혹은 '매우 그렇다' 라고 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와 '매우 그렇지 않다' 사이 정도? 가끔 솔직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혹은 솔직함에 정말 어떤 의미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솔직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솔직하게 생각하면 솔직한 것인가? 내가 솔직해도, 상대가 나를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솔직하지 않은 게 되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이 타인과 100% 똑같을 수 있나? 없다. 그러면 솔직하다는 건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닌가.




 예전에 친한 친구A가 술자리에서 친구B를 소개시켜 준 적이 있다. 당시 A군인이었다. 휴가를 나왔다고 오랜만에 A에게 연락이 왔다. A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며, 얼른 술집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술집에 도착해서 A를 찾았다. A만 있는 줄 알았는데, A와 A여자사람친구 B도 있었다. AB를 따로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친한 두 친구를 서로에게 소개도 시켜줄 겸 한 번에 불렀다고 했다. 휴가 나온 군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같이 자리를 했다.


 A는 자신이 나와 B랑 친하니, B와 나도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 내게 B를, B에게 나를, 인사 시키는 내내 둘이 좋은 친구가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B와 몇 마디 나누자 마자, B 친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B는 내게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B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A를 생각해서 그걸 A에게 말하진 않았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즐겁게 대화를 하려 노력했다.


 대화하는 게 조금 힘들어질 때쯤, B가 내게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말했다. A가 좋아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냐. 어차피 지울 번호 교환하지 말자." 이 말이 끝나자, B는 조금 당황했고, A는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이제와 생각하면, 번호 교환하는 게 뭐 대수라고. 저란 말을 했을까 싶다. 친구들 불러 모은 A를 생각해서 번호 교환하고, B랑도 마지막까지 잘 얘기하다 헤어졌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정 아니면 번호는 집에 가서 지워도 되는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 글로 써놓은 것만 보면, 그때 내게 중2병 쎄게 온 느낌인데.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을 하자면. 먼저 말했듯이 나는 B에게서 흥미로운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B도 내게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 근거로 든 내용이 다 내 생각들이긴 하다. 하지만 상대가 내게 관심이 없는 건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리고 B가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도 내가 A의 친구라서, 내키지 않지만 형식상 물어보는 느낌이었다. 이 술자리 끝나고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되는 사람. 교환하고 다음날이면 지울 번호. 이런 것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시집출간한 적이 있다. 독립출판으로 다른 저자들과 함께 쓴 공저 시집이었다. 출판사에서 광고용 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데 쓰라고 꽤 많은 책을 보내왔다. 가족들과 친구들,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에게 출간 사실을 말하고, 혹시 받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몇 명이 받고 싶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줄 책을 회사로 들고 갔다.


 그들에게 책을 나눠주는데, 그중 한 명이 유난히 호들갑 떨었다. '나도 어려서부터 시 좋아했다, 시인은 누구를 좋아한다, 책에 싸인해달라, 싸인할 때 자기 이름도 써달라, 진짜 꼭 보겠다.' 는 등의 말을 했다. 평소에 책을 정말 안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서, 의외라고 느꼈다. 하지만 책을 받아주고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고마웠다. 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 많이 반성했다. 그래서 열심히 책에 그 사람 이름을 쓰고, 싸인도 했다.


 그러다 호들갑 떨던 동료가 퇴직하게 됐다. 그는 그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탕비실에 분리수거함을 지나치다가 종이 모아두는 박스 안에 버려져 있는 시집을 봤다. 첫 장을 펴보니, 호들갑의 이름이 써 있었다. 화는 안 났다. 책을 다 읽으면 버릴 수 있다. 퇴사하는데 들고 갈 물건들이 많아 무거워서 버렸을 수도 있다. 혹은 책 내용이 취향에 맞지 않거나 너무 별로여서 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나를 싫어했을 수도 있고. 이해했다. 근데 시집을 내게 다시 돌려줬어도, 아마 나는 기쁘게 받았을텐데. 얼마 안 된 거의 새 책인데 버려지기에는 아까우니까. 


 이렇게 버려질 줄 알았다면 주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치만 달라고 하는데 또 어떻게 안 줄 수 있었겠나. 안타까운 건, 버린 책을 보이지 않게 잘 처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그러지 못했던 게 좀 아쉬웠다. 아니면 버린 책을 내가 보든 말든 관심 없었을 수도 있겠다. 지만 그는 솔직했다. 버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솔직하게 책을 버렸다.  좋았다. 호들갑 이름이 써진 첫 장을 찢어서 버렸다.

  


 

 어렸을 땐, 솔직함 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솔직하기 위해, 타인에게 일부러 위악적인 행동을 했다. 지금은, 솔직하기 싫어서 일부러 착한 척을 한다. 두 가지 다 해보면서 살아왔는데, 신기한 건, 둘 다 욕 먹다. 


상대가 정말 내게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대의 속마음 까지 헤아리는 일은 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해도, 그건 결국 내 추측일 뿐이다. 아니면 그만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 내 진심을 보여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내 진심에 상처 받을 수 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상대가 진심이 아닐 경우, 나도 상처 받는다. 둘 다  많이 드는 것에 비해, 얻는 게 적다. 이렇다 보니, 저절로 효율적인 '중간만 가자' 를 지지하게 된다.


 다시 B와의 술자리로 돌아간다면,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번호를 교환할 것이다. 그리고 호들갑 다시 책을 달라고 한다면. '어차피 버릴 거 잖아요.' 라고 말하는 대신, 또 책을 쥐어줄 것이다. 


  중간 정도로만 고 싶다. 내 솔직하기도 하고, 솔직하기도 한. 이 마음을 괜찮아하는 사람있다면. 그 사람 하고만 잘 지내고 싶다.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솔직함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나도 상처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솔직하고 또 솔직하지 않은, 이 글을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안 읽을 거 알아요.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전 14화 내가 잘하면 남도 내게 잘하는 세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