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os 지니 May 14. 2019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전환', 노동의 미래는?

'칼 폴라니' 에게서 배우다


한바탕 흐드러진 봄꽃 잔치에도 꾸물꾸물 기지개만 켜던 뭇 생명들이 어느 날 일제히 이 계절을 점령해버렸다. 깊은 겨울 끝에 드러낸 이 계절의 향연은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중요한 유희거리 중 하나다.     


허나 삶이 그렇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잠깐의 이 호시절을 즐기려면 나머지 시간을 호되게 견뎌내야 한다. 태어나 자라서 결혼하고 자식을 양육하고 노후를 보냄으로써 생을 마감한다는 인간의 ‘생애 주기’를 보면 삶의 모든 여정이 경제력(돈)으로 점철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인생은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이라는 굴레 자체일 뿐, 유희의 기억은 잠깐씩 스치는 추억이었다. 

    

‘자본주의의 결함’을 바로잡겠다는 세계의 부호들!    

 

그래서 사람들은 ‘한량’이고 싶고 ‘한량스러운’ 삶을 꿈꾸는지 모른다. 이 충만한 계절을 즐기는 기분이 한량스러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5월 첫날이 노동절인 탓일까, 계절의 유희를 즐기는 순간에도 어딘가에 묵직한 강박이 있다. 이 잠깐의 유희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수많은 ‘김용균(태안화력발전 노동자)들’이 여전히 질병과 사망 사고에 방치된 채 우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그렇게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본의 노동자들을 향해 ‘구해주겠노라’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부호들이다.


세계적인 거부들이 자신들을 부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자본주의를 걱정하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서는 18~29세 미국인 중 사회주의에 긍정적이라는 비율이 51%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들이 걱정할만한 현실임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29일 ‘미국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불평등 심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 현상을 지적하며 자본주의 결함을 바로잡아 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달아 제기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문제의식에서 희망을 기대하긴 어렵다. 여전히 법인세 삭감을 지지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인색하며, 분배를 거부하면서도 기술의 발전은 독점하겠다는 이들 자본가들이 인식하는 자본주의 결함이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할 뿐이다.     


인간 노동의 상품화, 자본을 종교화하다

     

종교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위를 규율하는 시대가 있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의식과 행위를 규율하는 근간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반된 가치인 듯 보이는 이 ‘종교’와 ‘경제’가 어떻게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일까? 바로 ‘경제’의 ‘종교화’다. 원시 종교 사회 이후 인류가 이루어온 정치, 문화, 경제, 철학 등의 역사적 산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는 일방향의 영향력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규정하는 보편적・절대적 가치다. 즉 법·도덕·관습 같은 규율 체계를 포함한 이들 역사적 산물들이 각자 고유한 기능으로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오랜 상식이 깨졌다. 이제 이들 역사적 산물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보조하고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가 된 경제도 실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스템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물물교환이 ‘경제활동’의 시작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 ‘경제’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가치 체계로까지 등극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거대한 전환: The Great Transformation>(홍기빈 역)의 저자 ‘칼 폴라니’는 모든 사회와 문명은 그들이 존속하기 위한 여러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요소에 의해 제한 받기 마련이지만, 19세기 문명이 경제적 문명이었다는 말은 이와 완전히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 행동의 무수한 동기들 가운데 일상적 행동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선 적이 거의 없었던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해 문명 전체의 기초로 작동하게 만든 이 메커니즘은 순식간에 지구의 일부를 뒤덮어버린 가장 거친 종교적 열광의 폭발만이 비견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씨앗은 사유재산과 상업자본이 활발히 형성되던 15세기로 거슬러간다. 자원의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행위인 ‘축적’과 ‘사유화’는 이미 독점의 가능성이 내포된 것이었고, 자본력은 독점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로까지 작동할 수 있게 된 기반에 바로 초국가적 금융자본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노동의 역사는 어떤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의 형식도 변해왔지만 더 많은 자원 획득의 수단으로 공히 타인의 노동을 지목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결국 노동의 상품화와 함께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 자체를 ‘경제 활동’과 완전히 등치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고, 노동의 상품화도 더 이상 이상할 것 없다는 인식으로 확산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기조정 시장에 순종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분위기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초기의 혼란기를 딛고 성숙하게 되는데, 폴라니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온 인간 세상이 그 메커니즘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고 비유했다. 결국 ‘경제’는 더 이상 사회를 움직이는 부분적 요소가 아니라 전부가 된 것이다. 자연히 인간의 모든 문명의 산물들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자본의 하부구조가 된다.  

    

산업혁명 전후, 노동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나? 

    

사실 상품의 가치란 각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부가가치의 ‘총합’이다. 즉 ‘투여된 노동력의 합’인 셈이다. 이 노동력을 지배하게 되면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의 역사였다. 따라서 자본이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의 전환기마다 노동을 통제하는 방식도 변화했다. 

      

먼저 산업혁명기를 전후해 자본이 노동을 관리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했을까?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가 노동일을 연장하려는 자본가의 투쟁 시기였다면, 이후는 노동일을 줄이려는 노동자의 투쟁 시기였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바로 기계의 발명이 있었다.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정의 리듬을 주도했던 숙련 노동이 기계의 리듬으로 귀속되었고, 이로써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실질적인 포섭이 가능하게 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시기, 자본가는 노동자를 공장으로 모아 놓았을 뿐이지 노동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노동이란 노동자의 의지와 능력, 노동 방법에 따른 것이었기에 자본가는 게으름, 태업, 자의적인 휴식과 중단 등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일할 시간을 최대한 길게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계의 발명으로 노동자의 노동 방법과 태업이나 휴식은 물론 노동자의 의지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반대로 노동자가 과잉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동일을 제한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어쨌든 기계를 통한 노동의 완전한 장악으로 생산성은 향상되었고, 생산성은 그대로 자본에게 더 많은 부의 축적 기반이 된다. 

     

그러나 산업 생산 기반이 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추려면 극복해야할 문제가 더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 당시 극히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근로환경이다. 특히 여성·연소 근로자의 참상은 자본주의 발전 자체를 위협할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이를 개선하고 규율할 ‘공장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자본과 노동 그리고 이들을 규율하는 법률 체계라는 형식이 완성된다. 공장법은 이후 노동운동의 진전과 함께 본래의 노동력 보전이라는 방향으로 근로환경을 끌어올리고 보다 진보된 내용을 갖추면서 오늘날의 노동법으로 발전해왔다. 

     

단계적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아웃소싱     


그러나 노동법은 대체로 근로관계를 맺은 이후의 노동자를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 기계를 통해 노동을 장악해온 자본은 근로관계 이전 단계에서 노동자들을 노동 현장에서 제외시키거나 노동력의 일부만을 수령하는 방식(비정규직 형태)으로 노동을 더욱 통제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이는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완화 정책을 통해 실현된다. 1980년대 후반 규제완화 정책의 시작과 함께 세계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미국 발 ‘아웃소싱(오프쇼링 포함)’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미국 제조업 분야에서 시작된 아웃소싱 바람은 경영합리화의 대명사였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우리나라에 상륙한 시기는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1997년 경제위기(IMF)’ 직후다. 효율성, 비용절감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대기업을 시작으로 소사장, 하도급, 용역, 파견 등의 이름으로 구석구석에서 아웃소싱이 시작됐다. 기계 혁명이 인간의 노동력 통제를 통해 생산성 증대를 기했다면, 아웃소싱은 노동의 단계적 착취를 통해 만들어낸 잉여 노동력을 퇴출시킴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켰다. 따라오는 인원 감축, 해고, 임금 차등화 등의 비용절감 정책은 노동자가 감내할 덕목이 되었고,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 충격은 노동조합 등의 저항조차 무력화하며 산업 전반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가 고스란히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 노동의 양극화, 상시적 정리해고, 무한경쟁 체제, 성과 지상주의, 무지막지한 원·하청 관계와 같은 고질적인 사회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다시 거대한 전환, 어쩔 수 없는 대세이니 받아들이라!   

  

이런 와중에 우리 사회는 다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기반으로의 전환기마다 익숙했던 구호도 들린다. ‘어쩔 수 없는 대세이자 흐름이니 받아들이라!’ 과연 변화는 숙명인 것일까? 칼 폴라니가 바라본 거대한 전환기의 산업혁명 당시에도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다. 경제 성장이 무의식적인 방향으로 벌어진다 해도 결국 스스로를 치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이 형성되면서 ‘사회적인 사건들을 경제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려 했다. 이런 맹목적인 사회 흐름에서 폴라니가 주목했던 것은 영국 튜터 왕조 시기의 ‘종획운동’이었다. 

    

종획운동(인클로저운동)은 영국의 영주와 귀족들이 토지에 경계 표시를 시작하면서 사회 질서를 뒤집어버리고 사회조직의 근간이 무너졌던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압력·위협 같은 수단이 거침없이 사용되고,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쓰레기더미로 무너져버린 광란의 시기였다. 폴라니는 당시 종획운동의 처참함이 가공할만했음에도 그나마 이 재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속도의 제어’였다고 분석한다. 즉 튜터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을 발동해서 사회가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경제 개발의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인데, 이는 변화의 과정에서 ‘속도’가 ‘방향’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변화의 방향은 우리의 의지로는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속도 조정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서 속도를 높이거나 늦출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부의 집중화로 중산층까지 무너져버린 우리 경제는 더 이상 짤 것도 없는 마른 수건이 되었지만, 세계는 또 다시 거대 자본이 이끄는 ‘거대한 전환’의 풍랑 속에 놓여 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감도 가세한다. 자유 시장 경제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산업혁명 당시의 맹목적 분위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그러나 국가 간 치열한 기술 경쟁의 환경에서 기술을 독점한 채 비집고 들어오는 자본의 모습만은 산업혁명 시기의 모습과 더 이상 견줄 수준이 아니다. 

     

그 기술혁명의 신호탄이었던 우리나라 승차공유 사업이 처음 합의에 이르렀을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칭찬 기사를 실었다. 앞으로도 신산업과 기존 산업의 이해 충돌이 계속 발생할 거라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대화가 문제 해결 방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 문제가 그렇게 도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는지는 의문이다. 

    

영세 음식점 사업에 뛰어든 배달앱 플랫폼들이 열악한 자영업자들 전체 매출의 20%를 점령하고 있다. 공유경제 사업의 협상 테이블에 올라야 할 플랫폼 기술, 그리고 구현해갈 사업 메커니즘과 내용을 택시 기사들은 이해할 길이 없다. 애초 이들 사이에 대등한 협상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이유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하는 상대방을 향해 당근을 든 채 머릿속에서는 신산업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상황을 과연 담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질서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도 새 질서에서의 삶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인류 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기술의 오랜 축적의 결과다. 그 인류의 오랜 축적물이 자본 축적의 새로운 수단이 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해 자본에 기여해왔듯이, 인간을 위해 기여해야할 그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고 핍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 제어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은 기적에 가까운 생산도구의 발명으로 촉발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은 뒤죽박죽으로 망가지는 파국이 함께 나타났던 시기였다. 새로운 조건들 아래 나타난 심각한 폐허와 이전의 사회 조직들이 파괴돼 버린 그 시기에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통합해보려던 시도들이 왜 참담하게 실패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던 폴라니가 주목한 것이 있다. 바로 ‘변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다. 

     

폴라니에 따르면,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 때 방향을 통제할 수 없고 속도도 지나치게 빠르다면 가능한 한 그 속도를 늦추어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생각은 너무나 낯익은 것이며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자 이런 생각이 공리주의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고, 경제 성장이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벌어지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치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경제 개발만 이루어진다면 어떤 결과든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비적 태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처음 인간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노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환경 기반이 사라진 채 ‘자본을 위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다가오는 기술혁명은 다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불안한 인간은 다시 자기를 위한 노동을 되찾고 싶지만, 이미 그 환경은 복구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폴라니가 말한 튜터 왕조 시기의 ‘속도’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에 대한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조정 능력이 무너지면서 겪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를 거대한 전환기로 보았다. 지금 우리는 기술혁명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거대한 전환기마다 그 방향도, 방향의 원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간은 늘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망가지곤 했다. 인간의 의식은 늘 시대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는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 전반에 복잡하게 누적된 다양한 요인과 욕구로부터 촉발되어 나타난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파악할 길 없는 개인들은 변화에 대한 대응은커녕 혼란스러움 속에 그저 떠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어도 속도를 늦춤으로써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지켜냈던 종획운동 당시 ‘속도’의 교훈을 빌려와야 할 때가 아닐까?  

   

인간을 노동력 가치로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태동 이후부터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가 인식하는 인간의 노동은 더 이상 기술혁명 시대가 원하는 형상이 아니다. 그 자본주의적 인식의 끝자락을 붙들고 기술혁명의 시대를 건너려니 인식의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혁명의 도래가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는 인식은 패배주의다. 새로운 가치 체계가 인간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면 그 세력에 맞서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려면 다시 속도에 집중해야 한다. 자본은 생명과학·의료, 공유경제, 빅데이터 등 미래 산업이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시장이라며 광범위한 규제완화를 서두르라고 압박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적 관점이 무시된 채 경제적 측면으로만 해석하려던 산업혁명기와 흡사한 분위기다. 이제 폴라니가 강조했듯, 정부는 ‘경제’ 대신 ‘인간’을 중심에 두고 미래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거스를 수 없는 방향으로 휩쓸리더라도 ‘인간’이라는 중심을 놓지 말아야 할 때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상’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는 자본의 그늘에서 일하는 인간상을 세뇌하며 그로부터 생존할 권리도 주어진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갈 권리와 풍요로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자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의 천부적 권리다. 이 오랜 기억을 되살려 깨어나야 할 때다.      


프레시안 기사원문 : http://naver.me/GBqsQXvY


매거진의 이전글 공유경제의 핵심은 '공유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