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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Jan 15. 2020

정보의 바다 디지털 '웹', 사유화 할 수 없다


'미국 빈곤층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기록적인 매혈 행렬', 한 언론의 최근 기사 제목이다.(<위키리크스 한국> 2019년 12월 12일 자) 우리나라 60년대 배경의 소설과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매혈 행위가 60년이나 지난 지금의 미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미국 빈곤층의 기록적인 매혈 행렬 

    

미국인의 40%는 현재 최소한의 삶을 위한 식료품, 주거, 의료서비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의 하나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혈액을 수거하는 기업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한다. 혈액은 인체 곳곳을 흐르며 영양소를 전달하는 신체의 중요 부분이다. 그 혈액을 거래하는 극단적 행태가 21세기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매혈하는 사람들은 몸무게 검증을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체중계에 올라서야 하는 비인간적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상품성을 가려내는 컨베이어 벨트의 선별 작업을 연상케 한다. 그래도 빈곤층의 매혈 행렬은 이어진다. 매혈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은 미국 사회에 남은 몇 안 되는 번창 사업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인간은 본래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를 경작하며 살아왔다. 삶의 기반이 공장이라는 생산 시설로 이동하게 되고,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생존하는 지금의 삶이 자연스러운 듯 보이지만, 사실 이는 산업 사회와 함께 시작된 수백 년 이내의 일이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수천 년 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토지(공유지)에서 쫓겨났을 때 농민들이 겪었을 공포감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매혈 행위 기사를 보면서 다시금 자본의 생산 양식으로부터 쫓겨나고 있는 잉여 노동자들의 모습이 인클로저 운동 당시 농민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동은 자본주의 경제의 혈액이다  

    

고대 노예 사회나 중세 봉건 시대에는 노예의 주인이나 영주가 생산을 지배하며 잉여를 수탈했다. 식민지 수탈과 함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자본은 지금과 같은 생산 수단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자원, 기술, 노동의 이동성이 거의 없었던 시대의 생산과 판매 시점을 연결하는 상업 자본이었다. 그들은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소량의 수공업 생산물을 교환하거나 판매해서 이익을 남겼다. 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에서 비롯되는 '부'의 개념이 노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분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아담 스미스에 의해서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 약탈로 교역과 상업이 급증했고 공업의 선대제(putting-out system , 先貸制, 상인이 독립된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나 도구, 임금 등을 지불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시키는 체계),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도래한다. 이때 생산 과정에 대한 모든 통제력이 체계적으로 박탈당하고 오직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노동자 계급이 창출된다. 인간이 시장 경제의 개별 요소로 완전히 편입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개인에게 강제된 이 초라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자본가에게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고도 잉여가치까지 창출해 주는 든든한 복덩어리가 아닌가.  

   

이는 끝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혈액이다. 그럼에도 이 복덩어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사회의 불안 요소가 된 노동 문제를 보고 노동자 후생과 행복 증진을 위해 사회를 개조하자는 급진적 지식인들에 대한 반박 논리의 결과물이 '인구론'이다. 맬서스는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모든 계획을 거부했으며, 그들의 생활 수준을 그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생계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면서 모든 구호의 입법화 시도에도 반대한다. 부유한 계급은 도덕적 인격을 갖춘 반면, 빈자는 도덕적으로 저열하다는 그의 사상적 기반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오랜 투쟁으로 노동자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제도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다시 기계화로 밀려나는 노동

      

그러나 산업화 과정이란 인간 노동을 끝없이 대체해온 기계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노동자는 때로 기계화에 맞서기도 했지만 과학기술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 노동이 여전히 생산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산업화 과정이 진행되는 한, 노동이 부분적으로 위축되는 일은 있어도 새로운 영역의 지속적 생성과 함께 소멸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정상적인 수준에서 재생이 가능한 만큼의 평균적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재생의 흐름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노동의 착취 구조가 은폐되는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자신의 노동이 어떤 수준으로 평가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은 노동자가 늘 감내해야 할 몫이다. 급속한 기계화로 노동력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일부 산업은 아예 노동력 없이도 작동이 가능한 구조로 이행되고 있다. 디지털 기반의 기술이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는 동안 겪게 되는 생존 메커니즘의 급격한 변화는 불안감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가 인식해온 전형적인 노동의 모습이란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 사업주의 관리·감독 하에 놓인 노동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활용은 관리·감독의 영역도 비껴가지 않았다. 출·퇴근 기록, 전산 기록 등을 관리하는 IT기술은 별도의 감독 없이도 노동 통제를 가능하게 했고, 점차 자율 근로(유연 근무, 파트타임, 재량 근무 등)의 노동 형태로 이행시켰다. 기술의 활용으로 물리적 한계가 극복되면서 하청, 도급, 파견 등 관리 주체의 변화를 동반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으로까지 이행된다. 

     

기술의 발전은 사업주가 직접 관리·감독했던 산업화 초기의 물리적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노동 형태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그 극단의 형태다. 제품 생산은 자동화되고 배달 등 이동 수단 기반의 말단의 직업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 역시 앞으로 드론 등 로봇으로 급속히 대체될 전망이다. 이처럼 기술의 고도화로 노동이 소외되고 플랫폼 노동과 같은 불안정 노동자들은 급증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 

     

노동자의 안전, 책임지는 주체도 없다      


관리·감독의 형태는 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상의 책임 주체를 드러낸다. 관리·감독은 작업 공정의 관리 의미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안전 관리 의무를 포함한다. 그 안전 관리 의무는 사업주에겐 비용이다. 그러나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에서는 이런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노동 과정은 IT와 디지털 기술로 얼마든지 관리가 가능해졌지만 안전한 작업 환경 문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비용 절감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기업의 속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규제와 대안을 준비해야 할 국가와 사회가 이런 문제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의 시작과 종료 시간, 고정적 임금액 등 중요한 근로조건을 특정해서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바로 근로 계약이다. 그러나 플랫폼 노동은 이런 계약 조건들이 무시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켄 로치 감독)'에서 고발하는 0시간 노동 계약은 그대로 우리의 플랫폼 노동, 파트타임 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정성이다. 수행할 노동의 양과 시작 시간, 종료 시간도 특정되지 않은 채 대기 상태에서 무작정 호출을 기다려야 하는 불규칙적인 노동은 개인의 안정된 삶 자체를 해체한다. 언제 일하고 언제 휴식할 지 자기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업주와 소통하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제반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 역시 종래엔 사업주가 부담하는 비용이었다. 하지만 개인 사업자로 내몰린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의 지시·전달 수단이 된 휴대폰은 물론 오토바이나 차량 등 이동 수단까지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 이들은 사업장이 아닌 도로 등 공공시설을 사용하며 근무하지만 사업주는 어떤 사회적 비용도 치르지 않는다. 위험천만한 거리에서 방치된 채 생명을 건 질주를 하다 사고를 당해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들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업가인가 노동자인가.      

정보의 바다 디지털 '웹'은 필수재, 공공성 규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체계적으로 박탈당하게 된 것은 생존의 필수재인 토지를 일부가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용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일상이 기록되는 웹(web) 환경은 지금의 모든 인류를 연결하는 필수재가 되었다. 구인·구직에서부터 업무 수행, 쇼핑, 취미활동 등 수많은 일상들이 동시에 축적되고 공유되는 삶의 기반이다.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은 한 신문 칼럼에서 '오늘날 모든 것을 연결하는 디지털 네트워크야말로 권력을 지탱하는 기술적 그리드(연결망의 총합)의 표상'이라고 했다.(☞ 바로 가기 : <한겨레> 2018년 8월 2일 자) 위기에 처한 것은 우리의 친밀한 삶에 대한 통제만이 아니고 운송, 보건의료, 전기, 물 등 오늘날 모든 것이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공유재인 웹의 통제를 놓고 벌이는 투쟁이야말로 오늘날의 투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플랫폼 이용자들이 실시간 축적하는 무한한 정보량은 어떤가. 플랫폼 기업들의 더 큰 관심사이며, 이 정보들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정보의 독점적 사용의 위험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국가가 정보 활용에 대해 규제하고는 있지만 경쟁적인 기술 혁명의 분위기에 밀려 무엇을 어느 정도로 규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시민들과 대립만 하고 있을 뿐, 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둔 '정보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을 두고도 우린 무엇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 지 명확한 기준을 공론화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독점화는 심화되고 정보 제공자들은 더욱 예속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태동 당시 토지의 독점으로 농민들이 생산 과정에 대한 모든 통제력이 박탈당했던 상황이 현대인의 삶의 기반이 된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과 일상은 모두 디지털 클라우드에 영원히 기록·저장되면서 필요에 따라 기호, 소비패턴, 감성까지 추적·분석해내는 데 활용된다. 당장의 편리함에 모든 걸 내주고 있다. 지젝은 우리가 스스로를 가장 자유로운 상태로 느낄 때(즉,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웹의 세계를 유영할 때), 완전히 '외화'되며, 교묘하게 착취당한다고 말한다. 웹과 디지털 기반에서 축적되는 정보의 독점과 사유화를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변혁의 시기, 사회적 자본 확충과 주체적 노력 필요

      

지금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 것은 인류를 물리적 공간으로부터 해방시킨 디지털, 진화해가는 전자 기기들, 쌓여만 가는 축적된 개인 정보들이다. 당장의 편리함에 모든 걸 내준 치명적 결과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노동은 여전히 생존의 필수조건인가? 여전히 복지 등 보완의 방법들이 동원되지만. 이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산업 사회의 방식이다. 이미 그 공식이 깨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 20년간 기술 혁명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 사회를 변화시켰고 변화를 겪어왔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하기조차 어렵다.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좀 더 미래적 관점에서 인류의 생존을 걱정한다. 그는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죽음조차 이미 기술적인 문제일 뿐 극복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구글벤처스도 보유 자산 중 36%를 이미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듯이 현대 과학의 주력 사업은 점차 불멸, 영원한 삶을 위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중요한 문제를 시사한다. 미래의 기술 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없앨 것이라는 단순한 문제 말고도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기술 혁명 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필요한 존재일까?     

 

유발 하라리는 생명 연장 프로젝트가 보편적 인류를 위할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아주 극소수만을 신의 경지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금처럼 보편적인 의료, 교육, 복지 등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따라서 인류가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노동이 소멸되는 만큼 산업 사회, 자본주의의 산물인 정책들도 함께 종료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동안 노동을 통해 자본 축적의 기여자로서 누리던 평균적 생존 기반에 그 많은 돈을 퍼부을 이유도 필요성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 혁명과 함께 산업 사회의 전통적 체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생산 요소로서의 지위도 소멸되는 중이다. 이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구조에서 굳어진 우리의 의식도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구조에서 밀려나지 않을까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무엇을 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정보화 사회, 디지털 웹 체계에서 형성되고 유도된 개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공재인 토지의 사유화로 시작된 생산 기반에서 인간은 결국 매혈 행위로까지 내몰리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 웹 기반에서 미래 권력이 될 정보가 소수에 집중되고 사유화되지 않도록 공공성을 확보해가야 한다.

     

또한 미래 사회는 자본이 주도하는 방식이 아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자발적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들 간의 신뢰 기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자본, 사회적 신뢰가 아주 취약하다. 불평등 구조, 관료제적 정부 운영, 경쟁이 만능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자살공화국', '산재공화국'이라는 오명은 신뢰 지수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를 개선하지 않는 채 미래 사회를 주도해 갈 수 없다. 노동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품 노동자로서 길들여진 수동적인 자세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 수동적 관점이 아닌 주체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다.     


프레시안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7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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