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사회에서 야기되는 민감한 문제들은 대체로 세대 간 인식의 격차로 드러나곤 한다. 세대 간 갈등 양상으로도 발전하는 이런 경향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각자가 살아온 양식의 시간적 차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각 시대의 독특한 제도, 규제, 시스템 등 환경적 요인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런 환경적 요인들은 그 시대만의 독특한 감성과 문화를 형성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런 세대 간 갈등 대신 세대 내의 갈등을 자주 목격하고 있다. 세대 간 갈등을 넘는 새로운 갈등 요인이 생겼다는 의미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태는 복잡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가장 먼저 2030 세대의 이기주의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후 평등의 실현이냐 역차별이냐를 두고 논쟁이 불붙었지만, 젊은 세대의 이기주의 경향이라거나 사실관계의 오인 정도로 잠정 결론이 난 채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 언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를 인국공 사태를 바라보는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 인식은 대개 사태의 본질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대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의지의 첫 실험은 소득주도 성장을 견인할 현실적 생계 수준으로의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이는 노동 정책으로서도 첫 번째 실험이었다. 주 52시간제가 두 번째 노동 정책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놓은 중요한 정책이 우리나라 고용시장의 불안정 요인 중 하나인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 정책들은 하나같이 삐걱거리며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퇴색해버리고 있다. 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정책들도 역시 그림의 떡이 될 뿐이다. 좋은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추진하는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첫째 지점에 대해서는 확고하다. 그러나 두 번째 지점인 정책을 실현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정책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려면 어렵고도 힘든 합의의 과정은 필수다. 그런데 방향에 대한 의지만 확고하면 자연스레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부는 생각하는 것 같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약속은 사람이 먼저라는 철학을 실현해나갈 과정을 명쾌하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대통령이 공공기관인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직접 언급했던 것도 현실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불안정하게 하는 비정규직 고용 형태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언을 끝으로 국민이 더 이상의 과정을 지켜볼 수도, 공유할 수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근로환경 및 근로조건의 간격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지, 당사자 간에 합의해나갈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대책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계획도 제시하지 못했다.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합의와 설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많은 정책 사업은 이런 과정이 불분명하거나 생략된 채 결과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 공기업 노사 역시 대통령의 의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실현해갈 구체적 과정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그저 따라가려고만 했다. 대통령이 '우리 함께 꽃을 피워보자'고 제안하니 한겨울 온상에서 키운 꽃을 눈 덮인 정원에 당장 옮겨 심으려는 성급함만이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인국공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2030 세대는 옳든 그르든 어려서부터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교육 받아온 세대다. 세계적 불황과 함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흐름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자녀도 양육할 수 있는 척박한 환경에 이미 진입했던 세대다.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수단임을 몸으로 체득한 세대다. 취업 시장은 그 경쟁의 정점이었던 만큼 가장 민감한 지점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인국공 사태는 충분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지금까지의 룰(규칙)이 아닌 새로운 룰 대로 따라오라는 식으로 해석되지 않았나. 이기적이고 눈앞의 이익만 쫓으며 사회 정의는 생각할 줄 모르는 세대라는 일부의 비난처럼, 현상적으로는 그게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방향이 옳다고 한들 이런 상황을 그들이 선뜻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혁명적 사고가 아니고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종종 상명하달 권위적 구조의 전형으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전봇대 사건을 떠올린다. 지금의 세대가 그 시절처럼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의 말을 그저 따라가기를 원한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그런 맹목성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취업은 그들에게 이미 생존의 문제일 만큼 예민한 삶의 과정이었는데, 아무런 설명도 설득의 과정도 없이 적용된 새로운 룰은 그들에겐 그저 말없이 따라오라는 메시지로 읽혔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번 비정규직 전환이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기존의 룰에 충실했던 이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해도 당사자들을 향한 설명은 많이 부족했다. 좋은 방향의 정책을 실현해가는 데 있어 이해당사자들과 협의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이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정부 정책 사업 실패 사례는 이번만이 아니었다.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절실한 이유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소득주도 성장의 일환으로 시작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양쪽 모두로부터 직격탄을 맞은 일이 그랬다. 영세 사업장에 대한 별도의 지원 대책도 없이 최저임금만 덜렁 올려놓았을 때 최저임금을 맞추지 못하는 영세 사업장들도 이번 인국공 세대와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갈등이 예상되었고 문제점들이 훤히 보이는데도 정부만 눈치 채지 못했다. 최저임금 16%를 인상하면서도 그에 적응하지 못할 기업의 입장과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자리 불안정 등을 예측하지 못했고, 이후 드러날 문제들을 보완할 방안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문제가 불거진 이후 부랴부랴 지원금을 풀고, 카드 가맹점 수수료를 내리라고 압박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직접 사회적 분란을 키웠고, 정책 방향마저 위태롭게 했다. 정성을 다해 쌓은 성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보수 언론과 보수 진영은 영세 사업장이 다 망가지게 생겼다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리고 실직의 위험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최저임금 노동자들을 부추겨 ‘을’들 간의 싸움으로까지 번졌던 상황에 빌미를 제공했다. 부랴부랴 영세 사업장 지원금 규모 등 후속 대책을 내놓았지만 본래의 취지는 이미 퇴색해버리고 야심차게 추진했던 정부의 첫 작품은 끈 떨어진 연처럼 동력을 잃고 휘청거렸다.
주 52시간제를 추진할 때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사업의 분류와 특성, 사업장 규모별 상황을 치밀하게 점검하고 근로 현황을 현장 실사 했다는 소식을 듣거나, 주 52시간제를 실시하게 될 경우 어떤 유형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지에 대한 예측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정리한 정부 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제대로 된 현황 파악도 없이 주 52시간제 법안부터 통과시키면 모든 사업자들이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물리적으로도 어찌해볼 수가 없는 사업장들이 속출하자 법률로 정한 주 52시간제를 계도기간이라는 행정적 조치를 통해 유예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연출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역시나 '을'들 간의 싸움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똑같은 행태가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고통은 온전히 국민들 몫으로 남았고, 갈등은 고조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근본부터 차근차근 다시 점검하고 준비해야만 정의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확한 현장 실사가 이뤄져야 하며, 이를 토대로 현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합의해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부가 결정하면 국민은 그저 따라가던 시대는 이미 저만치 가버리고 없는데, 길들여진 체질은 여전히 남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정부가 강력하게 주도해가야 할 정책들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의 정책에서 국민적 이해와 합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역할, 갈등관계를 해소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정부의 역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준비 없는 구호성 정책은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쉬이 지치게 한다. 주체가 되어야 할 국민이 피로감으로 지치면, 이후의 정책들도 줄줄이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실질적 생계 수준의 최저임금을 달성하겠다는 정책 의지에 대한 국민적 지지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였지만, 최저임금 인상률은 다시 1%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멀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을 설득하고 합의해가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해관계의 격차를 좁혀 나가려면 정확한 실사와 분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는 말에서 '과정'의 의미는 정부가 수행하는 정책 사업들의 과정도 예외 없이 포함된다. '공정'의 의미 역시 결과의 영향을 받게 될 당사자들과의 이해와 합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장기불황을 겪었던 이웃나라 일본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했던 경제 정책을 살펴보면, 많은 시사점이 발견된다. 일본이 장기불황과 함께 겪었던 극심한 양극화, 출산율의 감소, 소비 감소 등은 지금 우리나라 상황과 흡사하다. 이런 환경에서 진행된 고령층 증가와 생산연령인구의 감소, 장시간 노동시간, 임금 격차의 심화와 함께 1990년대 초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비정규직이 2017년에는 전체 근로자의 40%에 이르렀으며,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 임금의 60%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2016년 말 ILO(국제노동기구)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전격 수용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제반 임금 항목은 물론이고 복리후생, 교육훈련, 안전관리까지 4개 항목의 불합리한 처우 여부를 검토하며 항목별로 구체적 기준까지 만들어 제시했다. 이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기업에 임금 인상을 독려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한계기업의 퇴출과 이로 인한 실업자 지원 정책도 꾸준히 실시했다. 그 결과, 현재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80%까지 올라온 상태다. 물론 고용안정을 위한 이런 정책은 전체적인 경제 정책의 방향 속에서 함께 추진되었고, 그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기준, 그리고 지원 속에서 가능했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노사 대타협인 '샬트쉐바덴 협약'도 우리가 돌아볼 좋은 모델이다. 20세기 초 스웨덴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침체를 겪으면서 수출 부문과 내수부문 간 시간당 임금 격차가 1920년 5.6%에서 1922년 27.4%로 급격하게 벌어졌다. 이는 전국노동조합총연맹(LO) 내부에서 임금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임금 정책을 추진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된다.
이후 정부는 인플레 억제를 위한 긴축재정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사는 개별 임금 혹은 개별 산업의 수익성에 관계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향하는 연대임금 제도의 시행을 제안하게 된다. 1952년 엘오(LO)와 스웨덴 경영자총협회(SAF)가 중앙 차원의 단체 교섭을 맺기 시작하면서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인상률을 높이고 고임금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억제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결정된 평균적 임금(연대임금) 수준을 맞추지 못하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퇴출되는데, 정부는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발생할 경우 평균 임금의 70~80%에 해당하는 실업급여를 지원하고, 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일자리를 찾도록 주선했다. 1990년대 이후 중앙 차원의 교섭에 갈등이 생기면서 산업별 교섭으로 전환되었지만, 스웨덴에는 여전히 연대임금 정책의 취지가 살아 있다.
복잡해져가는 경제 상황에서도 방향성 자체까지 흔들리지는 않는 이유는 바로 모두가 동참해 합의해가는 정치사회적 의사결정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책을 합의해 나가는 과정은 공들인 노력만큼이나 도출된 결과를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왜냐하면 쉽게 도달한 결과는 언제든 쉽게 삐걱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과정을 중시하지 않고 쉽게 정책을 밀어붙이려 하는 한, 우리 사회는 더욱 깊은 갈등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 갈등의 과정에서 훼손된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도 어렵다.
한 일간지 칼럼(한겨레, 2020.8.12. 석진환)에서 기자가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언급했던 부분은 지금 시점에서도 되새겨볼 만하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나아가려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서 나는 어떤 안도감이나 든든함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 (중략) 어떤 이들은 대통령의 성급한 말을 비판했지만 내가 대통령의 말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 것은 그보다는 형식 탓이 컸다. 국민을 대신해 듣고 묻는 언론이 아닌, 참모들을 앞에 앉혀두고 현안과 관련된 중요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이상한 형식 말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질문은 받지 않아도 된다."
문재인 정부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철학적 가치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철학을 실현해가기 위한 정책들이 잘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정책들이 왜 완성되지 못하고 좌절되고 있는지, 정부도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 대통령의 약속에 해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좋은 과정을 생략하고 얻을 수 있는 좋은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소통은 이해당사자들이 합의해가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 실현 수단이다.
프레시안 원문 http://naver.me/FVUdg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