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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May 09. 2022

고졸자가 될 위험? 불공정 언어로 공정 설득할 순 없다

진영논리에 무너져 내리는 공동체 윤리 

                                        

우리사회의 폭력성이 도를 넘고 있다. 폭력은 한 사회가 유지되는 최소한의 기준인 법률, 규칙 등을 어기면서 시작된다. 그런 폭력성을 제어할 규칙들이 작동하지 않는다. 도덕과 양심을 말하는 진작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선을 넘어도 지탄받을 뿐이지만, 명백히 제재가 따르는 법률, 규칙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법의 그물망을 피하는 것일까? 약자들에겐 저승사자인 법이, 정보와 인맥을 독점한 사람들에겐 넘나들 수 있는 은밀한 기준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넘나드는 규칙들, 위태로운 사회


아빠찬스, 엄마찬스, 할아버지찬스도 모자라 남편찬스, 본인찬스까지 온갖 '찬스'가 신조어가 되었다. 'OO찬스'가 국어사전에 새로이 등재될 날도 머지않았다. 각종 찬스로 성장하고 찬스로 취득한 능력들이 다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그들이 이 사회를 움직인다. 이런 위장과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아이를 키워낸다는 것은 실로 모험에 가깝다. 인구절벽 현상을 그저 경제적 문제로 부각하고 싶은 이도 있겠지만, 청년 세대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당한 경쟁 대신 각종 찬스가 능력이 되고, 그런 가짜 능력으로 부를 창출함은 물론 사법 권력과도 긴밀해지는 현대판 계급 구조에서 법률, 규칙 같은 룰이 자신들에게나 엄격한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낀 이라면 자녀를 가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된 룰을 넘나들려는 인간 심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그 사회의 항상성을 해치는 수준이라면 어떨까. 각종 이력의 허위기재, 논문 짜깁기, 가짜 상장은 기본이요, 불법 증여·상속·투기와 위장 전입, 그리고 찬스를 동원한 입시·병역·입사·논문공저 등 상상을 초월하는 편법들이 그들의 일상이 됐다. 그들은 실상이 드러나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폭로한 사람을 향한 삿대질로 더 당당함을 보여줘야 그 일상은 공고해진다.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는 우리 사회의 작동 방식이다. 


이런 구조를 제어할 유일한 권리인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도 그런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각자 지지하는 권력의 편에 서서 부패의 경중을 겨루며 진영 싸움에 몰두하는 경우다. 부패한 권력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는 상상의 단어일 뿐, 더는 실천적 의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인 기회의 평등과 출발선 논쟁도 이미 저만치 밀어낸 채, 삶의 과정마다 부모나 가족의 인맥과 권력이 따라붙어 폭넓게 작용하는 사회. 


진영논리에 무너져 내리는 공동체 윤리 기준 


이런 뿌리 깊은 현대판 계급 구조가 진영의 구도로, 탈법·부조리의 경중을 따져 비판하는 것으로 해결이 될까?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보고 짖는다'는 오랜 속담이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를 지독한 진영논리로 몰아넣었던 조국 전 장관 사태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에 대한 '부산대, 고려대 입학 취소 철회를 요구하는 교수, 연구자 공동성명'에서 상처는 더 깊어졌음을 느낀다. 우리 사회가 공정과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차기 정부의 내각 후보군들 이력을 보면 내가 사는 이 세상 일인가 싶을 만큼 기상천외한 각종 편법, 탈법적 신종 발명품들이 줄줄이 사탕이다. 조국 전 장관의 윤리적 문제들이 새삼 무색해질 정도다. 그럼에도 조국 사태에서 경험했던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은 우리사회가 가야 할 방향과 교훈을 분명히 제시했다고 본다. 촛불 정국에서 시민이 이들 권력에 실어줬던 정의와 공정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정직한 삶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룬 양심과 윤리 기준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간절했던 공정과 정의는 더욱 부패한 집단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만한 교훈이 어디 있는가. 


이런 문제들과 별개인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와 그로 인해 한 가정이 송두리째 무너졌던 잔인함은 마땅히 해명되고 치유되어야 한다. 연장선상에서 조민의 부산대, 고려대 입학취소 역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가 누구의 자식이건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 없이 한 젊은이의 삶을 쉽게 부정했던 대학의 행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국 장관 일가가 살아온 전반적 삶의 방식이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불법, 탈법과 타협하지 않으려 고민하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이 했을 고민은커녕, 당시는 그랬고 현실이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극악스러울 만큼 기득권적 이익에 충실했다. 


불공정 언어로 공정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조민의 문제가 전국의 교수, 연구자들이 들고 일어나 성명서를 낼 정도의 사안이었는지 의문이다. 설령 불가피한 성명이었다 해도 성명서에 드러난 공정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더할 수 없는 실망감을 표한다. 먼저 성명을 발표했던 이들 지성들의 인식의 언어를 보자. 우리 사회에서 조국 장관의 딸 조민만이 그렇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가? 삶의 근간부터 흔들리는 억울함을 당해도 의지할 곳 없는 또래의 많은 젊은이들, 부모의 사회적 영향력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환경을 습관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성명서에서 얼마나 배려했나. 아니 이는 배려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제대로 인식하는 균형 감각의 문제다.


정호영, 한동훈 등 후보자나 조국 전 장관의 자녀들은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상당한 기반을 가진 젊은이들이다. 출발선에서부터 줄줄이 포기부터 배워야 했던 자녀들, 학비 벌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또 다시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하는 수많은 자녀들, 이들 기득권 자녀들이 온갖 기회를 독점해 입학한 대학 인원 수 만큼 배제되었을 많은 입시생들, 살기 위해 선택한 위험한 일자리에서 산업재해라는 죽음의 숫자로 자신을 알리는 누군가의 자녀들. 이런 참담한 현실도 모자라 부도덕한 사회 지도층 자녀들로 상대적 박탈까지 감당하며 살고 있을 구조적 일상에 분노한다고 이들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했던 적 있었던가? 젊은이들 삶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는 부모찬스라는 망국적 사회문제 앞에서 '교수 부모찬스를 전수조사 하자'는 목소리에 성명서로 응답한 적 있었던가?


성명서를 읽다 보면 한 젊은이가 처한 부당함에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입학서류에 첨부된 표창장이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1단계 서류전형 통과가 공인영어성적의 우수함 때문이며 2단계 면접전형 또한 당락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경력 기재를 이유로 부산대는 입학을 취소했다'고, 그래서 '대학 4년과 의학전문대학원 4년 동안 그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의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모든 학력과 경력을 삭제당한 채 고졸자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그런 절절함으로 수많은 소외된 젊은이들을 세심하게 보듬는 걸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고졸자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은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가. 그 어려운 의학전문대학원 가고 싶어도 기회조차 차단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 어려운 의학전문대학원 아니라도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환경에서 피터지게 스펙 쌓고 경쟁하며 그에 못지않게 어렵게 공부하고 산다. 그런데 '고졸자가 될 위험'이라니. 고졸자가 하위 계급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그냥 '열심히 공부한 대학 4년과 의학전문대학원 4년의 과정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다.' 정도로 쓰면 될 것을, 굳이 고졸자 운운하며 '그 어려운 과정'이란 말까지 해야 했을까? 불평등한 경쟁 사회에서 한 젊은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졸자로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면, 이 사회가 조장한 의사라는 기득권을 잃게 된 것도 당연한 귀결 아닌가? 고졸자로 살고 싶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쩔 것이며, 고졸자로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겐 무어라 말할 것인가. 불평등 구조가 낳은 언어를, 기득권적 사고의 언어를 별 생각 없이 받아쓰는 것이 더 큰 폭력임을 모르는가!


세심함이 결여된 공정의 외침은 능력주의와 다르지 않다 


말꼬리 잡자는 것이 아니라 문구를 만든 이들 교수들에게서는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가 없었다. 이들의 표현 방식에는 의학전문대학원은 어렵게 공부를 마치는 과정이니 고졸자와 달리 더 구제할 필요성이 있고 특권을 인정해도 된다는 인식마저 읽힌다. 정유라-조민-정호영의 아들딸들로 이어지는 입시비리에서의 내로남불 공방이 결국 그들만의 리그라는 쏟아지는 비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성숙한 사회라면 학력도 직업도 개인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고졸자도 대졸자도 필요하고, 의사도 청소부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당연시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각자 위치에서의 모든 삶을 소중히 인정할 줄 아는 민주시민의 인식과 자질을 배우는 곳이 다름 아닌 교육 현장이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지금의 저급한 계급문화를 만들었기로서니, 대학의 지성들까지 그런 인식으로 공정을 말하는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주장하는 그 알량한 능력주의에는 무엇으로 답할 것인가. 


조민에 대한 성명서는 입학 취소의 문제였던 만큼 그 부분에 집중한 성명서였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지성의 전당이 대학이라고 스스로 밝혔던 그 이념에 걸맞게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시선이 가 있어야 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적어도 성명의 내용만큼은 한명의 학생이 아닌 교육 불평등의 피해자인 이 땅의 모든 젊은이를 염두에 둔 세심하게 배려된 문구였어야 했다. 나는 이런 식의 교수들 성명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을 더욱 고착화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눈앞 한 사람의 불공정을 구제하는 데만 급급해 수많은 불공정 피해자들은 무시되거나 또 다른 불공정이 기정사실화되는 이런 논조의 성명이 본질적 문제를 망각케 하기 때문이다. 


정경심 교수의 재판부에 냈던 조정래 작가의 탄원서도 그런 지점을 간과했다. 나 역시도 재판 형량이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부당함에 호소하기보다 '어려운 공부를 마친 우리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니 참작해달라는 식의 탄원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개인적 친분으로 내는 탄원서이니 어떤 내용이든 제3자가 비판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개될 것이 뻔한 이런 사려 깊지 못한 기득권적 언어로 인해 그런 환경을 꿈꿀 수조차 없는 젊은이들이 다시 한 번 느꼈을 거대한 벽을 이해하는가? 


도대체 '그 어려운 공부'란 것이 언제부터 우리사회가 보호해야할 기준이 되었는가. 이제부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다. 공교육엔 기댈 수도 없는 사회이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식에게 '그 어려운 공부'를 시켜 '우리사회의 소중한 자산'으로 길러낼 일이다. 언제 당할지 모를 부당한 법적 조치에서 안전해지려면 말이다. 심각한 갈등의 근원인 우리사회의 온갖 차별의 문제엔 이처럼 편협한 불공정 인식이 자라고 있다.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현장에서조차 이런 문제 지점을 놓치고 등한시한다면 그 근시안만큼 우리사회도 후퇴할 것이다. 


공자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고 했다. 예수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했다. 아마 부처도 비슷한 말씀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타인을 나와 똑같은 기준으로 공정하게 대하라는 말인데 이는 타인과 타인 간에도 역시 공정하게 대하라는 의미로도 통한다. 최소한의 기준인 법과 규칙이 건강하게 작동하지 않는 불공정 사회에서 공정성 담론은 허망하다. 지금 우리는, 심각한 불공정 사회에서 무뎌지고 익숙해진 기득권적 언어로 공정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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