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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Aug 03. 2022

한국판 '악마의 맷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필사 방식으로 성경과 지식을 공유했던 15세기 유럽에서,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유럽 사회를 정보혁명, 지식혁명으로 이끈 주인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명품을 가장 먼저 활용한 건 당시의 타락한 교회다. 면죄부로 돈벌이에 열중했던 교회에 이 활판 인쇄기는 단시간에 원하는 만큼 면죄부를 찍어낼 수 있는 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타락한 이들 교회를 비판하며 일어났던 종교개혁도 이 인쇄혁명 덕분에 성공한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유럽 전역에 전달되는데 불과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지식과 정보의 소통 공간이 획기적으로 확대되는 순간엔 늘 기술의 힘이 작용했다. 사람과 물자를 대량으로 실어 날랐던 최초의 이동 수단인 증기기관차 발명, 이어진 전기, 전화와 인터넷 혁명은 시공간 제약을 훌쩍 넘어 인간 삶을 세계무대로 옮겨 놓았다. 상품 노동에 기반 한 자본의 생산력 증대가 지금의 세계시장으로까지 뻗어갈 수 있었던 것도 기술의 힘이다. 인간은 그 기술 기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을 기꺼이 상품화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래도 아직 인류는 완전고용을 꿈꾼다. 


상품시장경제의 메커니즘 간파했던 마르크스와 폴라니 


카를 마르크스와 사회철학자 칼 폴라니는 상품 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 학자들이다. 분석의 초점은 경제가 인간사회의 일부가 아닌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사회구조다. 산업혁명 당시를 살았던 마르크스는 생산 및 생산관계로 이루어지는 하부구조가 결국 상부구조를 지배하게 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한 반면, 이후 1·2차 세계대전과 공황을 겪었던 폴라니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로 당연시 믿고 있는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허구임을 추적했다. 


폴라니가 말했듯이 '사회'란 인간이 존재하는 실체적 기반이다. 따라서 인간이 실존하려면 최소한 그 사회가 붕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19세기라는 독특한 문명의 모태였던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등장한다. 이 자기조정시장은 완전한 유토피아이며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는 시장이다.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아예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의 씨를 말려 버리기 때문이다(폴라니는 이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 따라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과 자연이 그 폭력적 방식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주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저, 홍기빈 역). 


폴라니는 19세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유럽 문명과 세계 자본주의가 겪어야 했던 격변의 순간들을 사회의 '이중운동'으로 설명한다. 이중운동은, 사회가 한쪽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수요와 공급의 가격메커니즘으로 운영되는 체제)으로 경제를 조직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화폐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보호 운동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상품이 될 수 없는 인간, 자연, 화폐를 상품경제의 토대로 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사회를 해체할 만큼 위협적이어서 이런 긴장에 맞서 공동체 스스로 자기보호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에게 공황은 사실상 자유시장 경제 원리에 완벽하게 근접해가는 상태다. 19세기 말 자유시장경제가 극도의 긴장으로 치닫자, 전쟁과 대공황 같은 위기가 오면서 파시즘, 공산주의, 뉴딜 정책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위기에 대한 사회의 대응인 이중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자기조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면 반대 방향의 보호주의가 작동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풍요의 세계시장이 자기조정 기능을 멈춘 지금의 위기는 어떤가. 환경재앙이 목전에 왔음에도 인류 스스로 신자유주의적 생산방식을 멈추지 못하니 자연이 대신 자기보호운동을 한 것일까? 이는 자연이 세계화에 제동을 건 최초의 전 지구적 현상이다. 


풍요의 바다, 세계시장이라는 허상 


세계화의 다른 이름인 세계시장은 세계의 값싼 제품 소비가 가능한 시장이다. 즉 어느 나라에선가 값싼 노동력으로 제공되는 자원과 제품들이 상대적으로 임금이 비싼 나라들에 값싸게 공급되는 구조다. 인류가 그 세계화라는 완전한 분업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던 끝자락에서 세계 공장이 갑자기 멈춰 섰다. 세계는 그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지만 이전의 풍요가 계속될 지는 의문부호다. 값싼 노동력의 나라들도 언젠가 자본의 축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산업사회로 편입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임금과 생산물가도 오른다. 세계 노동시장의 값싼 노동력도 함께 고갈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처럼 '풍요'와 '고갈'은 지금의 세계시장을 함축하는 핵심적 단어다. 누군가의 풍요는 누군가의 착취로, 어느 나라 도시의 풍요는 어느 지역 자연과 노동의 고갈로 연결된다. 폴라니는 이런 식으로 조여 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완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도 자연도 결국 한계에 이르는 순간이 온다면 사회적 관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풍요에 대한 경고음이었던 잦은 기상 이변에도 무심히 살아온 인류의 일상에도 지금까지의 풍요를 걷어낼 물가 급등이 찾아왔다. 이제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인간과 자연을 갈아 넣을 정도로 가혹하게 돌아갔던 신자유주의적 메커니즘에서 공동체를 지키려 작동한 보호주의(파시즘, 공산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이후 인류사회는 혹독한 후유증을 경험해야했던 세계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자유경쟁시장은 안녕한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자유경쟁시장은 어떻게 돌고 있을까? 우리의 노동시장에도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매섭게 돌고 있다. 해마다 산업 현장에서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갈리고 잘리고 찢기는 등 온갖 형태의 사고들로 사망한다. 심리적 맷돌도 돈다. 부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 양상을 넘어 시장 논리에 포위된 청년 남녀들의 갈등, 세대갈등, 직업 간 갈등, 젠더갈등 등 분리될 수 있는 모든 지점에서 갈등들이 폭증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기반인 '사회'는 실종된 채, 오직 효율성 중심의 '무한 경쟁'이라는 신념의 맷돌이 돌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심각히 인식해야할 정부는 오히려 갈등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다. 정부는 노동의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마치 지금의 경제위기를 노동자들이 너무 빈둥거린 탓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첫 단추가 이제 막 시작해 자리잡아가는 주 52시간제(연장근로 12시간을 제외하면 40시간)를 손보는 일이다. 주 단위로 상한을 규정한 연장근로 12시간 자체가 점차 줄여가야 할 대상인데 오히려 월 단위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확대될 경우 특정 주에 최장 92시간까지 근로가 가능하다. 이게 생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정부는 연장근로 확대의 근거로 유럽 등 선진국 사례를 들었지만 우리나라 연평균 근로시간(1928시간)은 이들 나라들의 연평균 근로시간(OECD 평균 1500시간)과는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산업혁명의 출발지인 영국에서 최초로 제정된 '공장법'은 살인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에 대한 요구였다.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지금의 유럽은 국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주 35시간 이내에서 30시간대의 노동을 한다. 20시간대의 노동을 포함해 주 4일 근로도 실험 중이다. 그런 흐름과 차이를 종합적으로 살피지 않고 연장근로 하나만을 두고 선진국보다 규제가 심하다는 식의 인식은 산재 1위 공화국인 이 나라 국민의 건강권 등 삶의 조건들을 아예 무시한 단편적 처사다. 


여당도 다를 바 없다. 자신이 추천한 젊은 청와대 행정관이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 9급 공무원일 뿐이어서 안타깝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절절한 해명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했다. 절망했던 이유조차 간파하지 못했던 그 무심함은 무지함보다 못하다. 그런 무심함에서 인간다운 삶을 생각하는 좋은 정책과 제도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단계 원·하청 착취구조의 끝은 개인사업자 


전 세계 기아 문제를 추적하며 투쟁해온 사회철학자 장 지글러는 '5초마다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은 살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미개함으로 만들어낸 풍요로움이 넘치는 이 지구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다. 우리나라 노동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눈물로 만든 빵에 반대한다!' 제빵사 5300명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해 불법 착취하고도 노동 조건을 개선하지 않는 파리바게뜨에 대한 불매운동의 표어다.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양산되는 소상공인들과 특수고용노동들은 사실상 노동법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유연적 노동들이며 많은 기업들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신자유주의적 맷돌 방식의 중심에 바로 이 다단계 하청구조가 있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사태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2배에 이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온갖 위험하고 힘든 노동은 대체로 수차례 하청으로 내려가면서 비용절감 수단으로 악용되는 구조다. 이런 불평등 구조는 놔둔 채 정부는 임금체계를 개선해 능력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한다. 물론 우리의 연공급제는 시대적으로 시효를 다한 골동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갈지를 결정할 근거는 정확한 실태파악에 있다. 과연 그 능력의 기준이 무엇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다른 처우를 감당하고 있는 원청과 하청 간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정확한 실사 파악이 우선이다. 순서가 뒤바뀐 정책 실행은 또 다른 경쟁적 부작용만 야기할 뿐이다.


해마다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혹하게 죽어나가고 있고, 많은 사고들이 하청 노동현장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 많은 노동 착취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사회가 몹시 불편하다. 시간당 최저임금 440원 올려달라고 집회를 벌이고 있는 노년의 청소노동자들을 상대로 젊은 대학생들이 수업권 침해 소송으로 대치하고 있는 이 극단의 사회는 장 지글러가 추적해낸 '기아와 다국적기업 사이의 잔인한 메커니즘'과 너무 닮아있다. 바로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견고히 뿌리내린 다단계 착취구조와 닮았다. 


규제혁신추진단을 만들겠다는 정부는 규제전문가를 채용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인식의 빈곤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16명의 채용공고를 내면서 1일 8시간 근무조건에 내년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196만 원을 제시했다. 지원자가 미달하자 깜짝 놀란 정부는 3시간을 대폭 줄인 5시간 근무조건으로 정정해 재공고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5시간 근무로도 가능했던 추진단 운영을 8시간으로 착각했다면 그런 주먹구구식 운영도 문제지만, 최저임금법의 취지와 그에 대한 인식의 부재 역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개정된 주52시간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 관련법들의 개정 취지가 여유로운 삶의 수준에 맞춰진 것이 아니다. 세계 산재 사망 1위 국가의 오명을 인식한데서 시작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유로운 삶은 '경쟁' 아닌 '관계'에서 


세계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린 세계시장을 목격했다. 거기서 다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서니 스스로 자본의 노예로, 소비의 노예로 살아온 삶의 그물망도 보인다. 적게 소비하면 노동시간도 조금씩 줄일 여유와 자유가 따라올까? 그 자유의 공간에 치열한 경쟁 대신 인간의 실존 기반인 '사회'라는 관계로 채우는 건 어떨까 상상해본다. 우리나라의 인구절벽을 해결하려면 그런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구절벽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도 문제지만, 우리사회에 만연한 극단적 경쟁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개선책은 요원하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체제의 붕괴는 극단적 시장경제에 대해 자연과 세계사회가 자기보호운동을 한 결과다. 다시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하는 데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맷돌방식의 시장에서 인간이 사는 '사회'로 나갈 것인지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다. 무한 소비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 착취로만 가능하다. 무한 착취 기반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 불평등과 그로부터 야기된 우울, 폭력, 자살 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도 연결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반세계화에 직면해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전례 없는 거대한 전환기와도 맞물려 있다. 인류와 함께해온 과학, 철학, 예술, 문화 등 모든 사유의 학문들은 더 넓은 세상, 더 먼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너머의 호기심으로 만들어낸 인류의 귀중한 결과물들을 오직 시장경제에만 '몰빵' 해서야 되겠는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타락한 교회가 이용하기도 했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는데도 쓰였다. 기술을 어떻게 가져다 쓰느냐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몫이다. 어떤 제도를 가져다 쓸 것인지도 당연히 인간의 몫이다. 그 쓸모에 따라 세상도 달라질 것이다.


원문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80110054992932?u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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