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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Dec 10. 2021

모순적 인간

취향

"한국 영화 안 좋아하시죠?"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아뇨, 한국 영화 좋아해요. 심지어 장르도 가리지 않고 한국 영화 많이 봐요"라고 나는 답한다.

"의외네요. 한국 영화 유치하다고 안 좋아할거 같았는데."

"유치한걸 싫어하지 않아요. 그리고 외국 영화에도 얼마나 유치한게 많은데요."

내가 이렇게 한국 영화를 두둔하듯 말하면 상대방은 언제나 깨름칙한 감정이 섞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 !!!, @@@ 봤어요? 어때요?"

그러면 난 이렇게 답한다.

"안 봤어요."

그제서야 상대방은 편안한 표정으로 답한다. 마치 자신이 나를 이겼다는 듯이.


난 영화를 좋아한다. 고오급 예술영화 뿐만 아니라 진짜 말도 안되게 유치한 영화까지 다 좋아한다. 덕분에 내 영화DB의 점수표는 다소 일관성이 없다. 평론가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영화부터 대중한테까지 외면 받은 영화들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 점수표의 기준은 내 주관이니 어쩌면 일관성이 확실한 것일 수도 있다.

일례로, 홍콩 영화 중에 양조위가 나온 "화양연화"와 "천하무쌍" 두편의 영화를 나는 다 사랑한다. "화양연화"가 온갖 미장센과 메세지로 가득한 영화인데 비해 "천하무쌍"은 갖은 유치한 말장난과 슬램스틱이 가득하다. 그래도 나는 두 영화를 사랑한다. 고상함과 유치함은 공존할 수 없는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상할 땐 고상하면 되고, 유치할 땐 유치하면 된다.

문제는 이도저도 아니고 뻔하기만 할 때 발생한다. 다시 처음의 대화로 돌아가서 마치 나의 취향을 재단하고 판단이 끝났다는 오만한 승리감에 취해있는 상대방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데 그 영화들 너무 뻔해서 안 봐도 될거 같아요."

도발이다. 그러면 언제나 상대방은 나의 발언이 오만하고 그 영화들도 나름의 가치와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근데, 나름의 가치 말고 절대적 가치도 있는 다른 영화 두고 굳이 제가 그걸 봐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거만 봐도 시간이 없더라고요."

상대방은 말문이 막힌다. 나의 오만함을 꺽을 수 있을거란 오만함이 되려 꺽인다. 상대방은 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반격을 준비한다.

"그냥 취향껏 보면 되지 않아요?"

나는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할 말을 잃는다. 이게 내 취향이라는데 어쩌겠는가. 더 뭐라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렇다 재미없게 뻔하다. 내가 싫어서 안 보는 영화는 뻔하게 감정을 쥐어짠다. 우리는 그런 전개와 감정을 신파라고 한다. 오히려 단순히 뻔한건 문제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배우의 연기나 영상미를 건질 수도 있다. 근데 뻔한데 보는이의 감정마저 결정하려고 하는건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없을 지경에 달한다. 내가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영화를 보는데 뻔한 감정을 강요 받는게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최소한 감상 만큼은 내 마음껏 해도 될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신파를 좋아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단지 그런 영화도 그런 영화를 좋다고 하는 사람도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취향이란 그렇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심지어 업이 아니라면 더욱더  권리를 침해받을 이유는 없다. (요즘은 업에 있어서도 취향이 전략이 되는 시대다.) 근데 나의 취향으로 인해 종종 자신의 취향이 부정당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자체도 신파적이다. 자신의 취향을 좋아해주길 나에게 강요하도 있지 않은가. 일관적이지 못 하게 고오급진 영화나 유치해빠진 영화를 좋아하 나를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취향을 좋아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본인의 일광적인 취향을 좋아해주길 바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고오급지지도, 유치하지도  하고 뻔하고 신파적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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