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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Feb 28. 2021

반 배정

2021. 02. 28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생각보다 인간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몇 반의 담임이 될지 결정된다. 각 봉투에는 이미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정된 스물다섯 내지는 스물여섯 명 아이들의 명단이 들어있고 다른 선생님들과 차례를 맞춰 제비를 뽑으면 그만이다. 


그 조촐한 순간에 담임은 물론이고 아이들마저 한해의 운명이 갈렸다. 

제비뽑기라니 1년의 향방을 결정해버리는 일치고 지나치게 탈권위적인 건 아닌가? 

AI가 나의 MBTI와 학생들의 MBTI를 치밀하게 분석해 최상의 궁합과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것 정도는 돼야... 아, 물론 그것까지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더 근사한 것이 있을 줄 알았다. 


사실 그 의혹의 근간에는 

'수학 쌤이 XX이 예뻐해서 이번에 데리고 간 거잖아.' 내지는 

'XX 잡겠다고 체육 쌤 반에 넣은 거래.'와 같은 학생 시절의 환상이 있다. 

아이들은 늘 근거 없고 은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소문 속에서 꽤 치밀한 방식으로 반 배정이 일어나리라 했던 생각이 십몇 년이 지나 무참히 깨졌고 나는 솔직히 좀 침울해졌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다음 해에 그대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게 선생님이 나를 예뻐한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난 올해로 교사 4년 차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담임이 되었다. 

첫 해야 일을 배운다고 행정부서에 있었지만, 그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지루한 행정의 일이 계속되었기에 조금 해방감도 있다. 교사의 꽃은 담임이라는 데 아쉽고 초조한 마음이 들을 때 즈음 드디어 바라던 학년부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간사해서 막상 담임이 되고 나니 걱정도 생기지만 그보다는 아직은 설렘이 더 크다.    

그 설렘으로 제비 뽑은 봉투 속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어루만져봤다. 작년에 가르쳤던 애들이 절반은 되는 것 같은데 모르는 이름도 있다. 

명렬표 속 작은 얼굴들을 보며 어떤 성격일까,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런 교사다운 아름다운 궁금증만 생긴다면 참 좋으련만. 


너무나 인간적인 나는 아무도 모르게, 얘들아 제에발 올해는 말썽 피지 말자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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