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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Jul 11. 2021

청소

이따금씩 의기소침해질 때면 집안일이 도움이 됐다. 거창한 대청소가 아니라도 말이다.  


이를테면 신발장 정리 같은 것.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신발을 정리하고, 종류별로, 혹은 색깔별로 구분하여 신발장 속에 넣는다. 서로 구두 앞코가 어긋나 있다면 맞춰서 가지런히 넣어놓고, 때에 따라서 더는 못쓰게 된 운동화는 과감히 버린다. 신발장에 있는 모래도 쓸고 모아 쓰레기봉투에 넣고, 며칠 동안 현관에 세워져 있던 우산마저 신발장 속에 딸려있는 고리에 걸어 놓은 채 문을 닫으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순간이 주는 소박한 성취에 문득 잘 해내고 있다는 위안마저 든다. 

고작 신발장 정리였을 뿐인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시들 거리던 내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다. 좀 더 큰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현관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주방을 정리해 볼까, 한다. (사실 까다롭게 따지자면, 화장실이 더 가깝겠지만, 여전히 화장실 청소는 나에게 공포이기 때문에 가장 나중으로 밀리곤 했다.) 못한 설거지가 있다면 그것부터, 그렇지 않다면 싱크대에 낀 물때를 스윽스윽 문댄다거나, 인덕션의 얼룩을 행주로 닦아본다. 배수구 속에 낀 찌꺼기도 싹싹 치우고, 그릇들도 제 자리를 찾아준다. 양념통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열을 맞춘다. 어느새 나도 깔끔하게, 얼추 비슷하게 엄마 흉내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엄마는 정리 정돈에 참으로 능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 학교에서 6교시가 끝나고 돌아오면 엄마가 가꾼 우리 집은 늘 한결같았다. 밝고, 쾌적하고, 청결했다. 언제 친구들을 데리고 와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바닥을 짚어보면 엄마의 청소가 언제 즈음 끝이 났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시원한 촉촉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엄마가 막 물걸레질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안방에서 티브이를 틀어놓고 사과나 옥수수를 먹으며 하루 중 가장 만족스럽고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였다. 그럼 나는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는 조금 미뤄둔 채, 은근슬쩍 엄마 옆으로 가 연속극을 흘끗 흘끗 곁눈질하며, 사과나 옥수수 따위를 입에 넣고는 괜스레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을 부풀리고 기일게 길게 늘어뜨려 엄마한테 얘기해 주곤 했다. 


그렇지 않고 거실 바닥이 보송하게 말라 있다면 엄마의 청소가 일찍 끝났다는 소리였다. 밀린 연속극을 보고도 시간이 남은 그는 여전히 거실의 베란다 창문과 부엌의 창문은 활짝 열어젖힌 채로 저녁 찬거리를 사러 장에 갔다. 

고층 아파트들이 보통 그러하듯 마주 본 두 창문을 통해 집을 가로지르는 맞바람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엄마가 청소 후에도 창문을 오랫동안 열어둔 이유는 자연의 바람과 햇살이 살균을 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가장 큰 수혜자는 나였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 기분 좋은 바람이 넘실대는 거실, 그 보송한 바닥 한가운데에 누워 따스한 햇볕을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눈을 감고 오만가지 상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사탕 달린 나무가 자라는 세상에 대한 상상, 받아쓰기나 구구단 따위가 없는 학교에 다니는 상상, 내 얼굴이 온 동네가 칭찬하는 15층 지은이처럼 예뻐지는 상상. 온 감각이 열린 채로 청결함과 고요가 주는 안락함을 느낄 때면 우리 집이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픈 날이면 어김없이 티가 났다. 무겁고 텁텁한 공기가 집안을 짓눌렀다. 참 이상한 일이다. 여전히 바닥은 보송한데 여전히 햇살은 따듯한데 어딘가 교묘하게 뒤틀리고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이것은 수년간을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온 나만이 알 수 있는 미세한 균열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조용한 집은 언제나 냉담했고 을씨년스러웠다. 집이 엄마의 몸상태를 투명하게 비춰주고 있는 것처럼. 그런 날이면 내 마음도 늘 어딘가 꽉 막힌 것 같았다. 


물론 엄마에게 결벽증이 있던 건 아니었다.(만약 그랬다면 결코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엄마는 단지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물건을, 공간을, 그리고 가족을 소중하게 여겼다. 4남매의 막내로 자란 엄마는 늘 언니들과 방이나 이불 따위를 함께 썼고, 학용품이나 옷을 물려받았기에 유독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이다. 

반대로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아빠는 아주 아주 좋게 말해서 속세에서 벗어난 물욕 없는 사람들이었고, 적당히 사실대로 말하자면 물건이나 집 관리 따위에는 무관심했다. 셋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늘 흔적이 남았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엄마의 노동이 되었다. 잔소리라도 들을라 치면 세 얼간이들은 꽁꽁 한편이 되어 그를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몰아 대곤 했다. 정리 정돈과 관련해서 서로 간에 사소한 마찰이 간간이 있긴 했지만, 엄마는 자신의 쓸모를 유지와 청결에서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긴 시간을 공존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몇십 년을 엄마와 함께 살면서 그의 손길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던 터라 독립을 함에 있어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정리정돈이었다. 도대체 엄마처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독립의 장점은 엄마가 없다는 것이고, 단점 또한 엄마가 없다는 것이지 않은가. 집을 박차고 나오는 게 좋긴 했어도 마음 저 한편에서는,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며, 밀린 설거지 따위나 버리지 않은 쓰레기봉투를 보며 내 바닥을 맞닥뜨리게 되는 날이 온 것 같아 두려웠다. 지저분한 집이 잘 꾸며놓은 바깥에서의 사회생활용 하현주의 진짜 모습을 낱낱이 직면하게 될 것만 같아서. 나조차 속여온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결국 집은 나오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가 엄마와 같이 깔끔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든지, 아니면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든지 하는 크나큰 반전은 없었다. 며칠은 깨끗하다가도 며칠은 너저분한, 참으로 인간적인 보통의 월세인이었다. 깔끔하지 못한 내 방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별문제가 될 것은 없었겠지만, 사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퇴근할 때 즈음이 되어 정리되지 않은 집을 떠올리면 머리가 아팠다. 집으로 가는 대신 친구들을 만나거나, 불필요한 야근을 하거나 카페를 돌아다니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시간을 연기하고 또 연기했다. 


하루는 엄마가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놀러 온다고 했다.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쓸고 닦고, 보이는 것은 뭐든 가지런히 했다. 내 앞가림 잘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으로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엄마 성격에 내 방 꼬락서니를 보면 쉬지도 못하고 치워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깔끔해진 방을 보며 작은 성취감과 만족감 같은 것이 생겼다. 크기가 아담하고 들여놓은 물건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청소를 하는 데는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렇게 간단한 걸.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뿌듯했다. 


드디어 엄마가 왔다. 집을 둘러보던 엄마는 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평생 서로를 백 프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딛고 있는 동그란 원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이유기도 했다. 

‘아니 엄마 오는데 그냥 편히 있지, 왜 시어머니 오는 것처럼 치워놨어.’

안 치우면 안 치워서 속상하고, 치우면 치워서 섭섭한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적당히 맞출까. 다행히도 30 몇 연차 만렙의 살림 장인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손길이 닿을 곳을 찾아내었다. 나 딴에는 딸 집에 와서도 일하는 엄마가 안쓰러워한 일이었지만, 엄마는 자신의 존재의 건재함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엄마와 나는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도 늘 엄마처럼 집도 잘 정리하고 깔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내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닮아 마음처럼 손이 야물지 못해 속상하다고. 나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 같다고.


말을 듣던 엄마가 이렇게 얘기했다. 집은 곧, 사는 사람의 마음 상태 같은 거다, 집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머릿속이 복잡한 때문이다. 그 말 끝에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해서 그래. 그냥 적당히 하고 살아.'라고 한다. 

열심히가 미덕인 엄마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에 갑자기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집의 상태가 내 마음이라면, 청소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속을 다스릴 수 있지 않겠니. 청소나 집 가꾸는 것은 노력한 만큼 되더라.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거나, 철두철미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나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증거였던 셈이야. 그냥 습관일 뿐이야. 청소에 인간의 본질 얘기까지 하는 네가 너무 웃기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


스치듯 말하는 엄마의 문장에, 나는 미안해졌다. 그의 삶을 너무 가벼이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고민이나 삶의 무게 따위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던 것일까. 결국 엄마의 집 청소는 자신을 단련하기 위함이었음을. 마음먹은 대로 하나도 돼 먹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그날 밤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신발장 정리로 시작한 대대적인 집 청소가 드디어 끝이 났다. 여전히 화장실 청소는 공포의 대상이라 미뤄두긴 했지만, 멀끔해진 방을 보니 기분이 좋다. 


이게 뭐라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기분에 사로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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