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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Nov 03. 2019

화가를 꿈꾼 소년

이상


이상 김해경과 구보 박태원. 나는 절망의 무대 경성에서 낭만을 연기한 두 사람을 좋아한다. 이상은 언제나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고, 구보는 언제나 헤헤 멋쩍게 웃었으나, 둘은 언제고 울고 있었다. 


홀로 있을 때보다 나란히 놓았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이상과 구보도 그렇다. 둘은 함께 있을 때 보다 선명해진다. 천재 이상과 모더니스트 구보. 그들의 불안과 고뇌, 낭만 그리고 문학을 엿보고자 둘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기로 했다.




제2조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해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

조선 교육령(1911) 


일제강점기 교육의 목표는 '충량한 국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충량(忠良). 충성스럽고 선량한 국민. 조선인이 일제에 대들지 못하도록 '말 잘 듣는 인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고하고 판단하는 일은 본토(일본)가 하겠으니 조선인은 시키는 일만 하라는 식민지 교육이다.


교육이 실종된 교실에선 훈련이 이뤄졌다. 충견을 훈련하듯, 교실에 칼을 차고 들어와 일본어를 가르쳤다. 공포로 충성을 강요했다. 조선 수탈이라는 목표 하에 '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고, '시키는 일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하급 관리'를 만드는 것에 온 역량을 집중했다. 철저한 우민화 정책이다.


더욱 비극인 것은 그런 학교마저 들어가기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1919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아동의 취학률이 90%이상이었던 반면 조선인 아동 취학률은 3%에 그쳤다. 조선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의 수가 극도로 적었다. 교육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의미 있는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아이들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시대였다.



화가를 꿈꾼 소년


이상은 영특한 아이였다. 그는 다섯 살에 천자문을 줄줄 욀 정도로 또래에 비해 똑똑했다. 아는 것은 힘이다. 그러나 아는 것은 짐이기도 하다. 영특한 이상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어깨에 얹힌 집안의 기대와 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상은 섬세한 아이이기도 했다.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을 향하지 않는 큰어머니의 편애도 명확하게 인식했다. 부자 아빠 큰아버지와 가난한 아빠 친아버지 사이의 괴리도 이상을 짓눌렀다. 모든 짐을 털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충격을 버텨내기 위해, 이상은 내면을 파고들었다.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아이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은, 자신을 감춰야 했던 이상이 자신을 온전히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오빠는 또 어릴 때부터 그림을 매우 잘 그렸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사로 보아 넘기는 일이 없는 그는 밤을 새워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종이에 옮겨 써보고, 그려보고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더라고 합니다. 열 살 때인가 당시 '칼표'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그 껍질에 그려져 있는 도안을 어떻게나 잘 옮겨 그렸는지 오래도록 어미나가 간직해 두었다고 합니다.

오빠 이상(1964) / 김옥희


중국을 통해 들어온 칼표 담배. 정식 명칭은 파이러트(PIRATE)이지만 해적이 칼을 들고 있다 하여 '칼표 담배'라 불렸다.


운명적 만남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신명소학교 시절 이상은 살색이 유난히 흰 아이였다. '흰 여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상의 성적은 우수한 편으로 4, 5등은 꾸준히 했다. 그러나 수석이 될 순 없었다. 당시 소학교엔 8세부터 20세까지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이상은 그중에서 가장 어린아이였다. 수석은 언제나 20살 가까운 청년 초등학생(?) 몫이었다. 성적은 어찌 되었건 백부 눈밖에 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상의 관심은 그림뿐이었다.


어린 이상의 8할, 아니 9할이 그림과 함께였다. 신명소학교에서 만난 구본웅 역시 그림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구본웅은 이상의 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이상에게는 친형과 같은 존재다. 훗날 조선인 최초의 야수파 화가가 된 그는 이상보다 나이가 4살이나 많았지만, 이상과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 사고로 꼽추가 되어 학교를 여러 번 쉬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이 같은 사람과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결은 두 종류로 나뉜다. 같은 열망을 공유하는 것 혹은 같은 결핍을 공유하는 것. 이상과 구본웅은 열망과 결핍 모두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구본웅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했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4개월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젖동냥으로 커야 했는데, 젖을 얻어먹고 집에 돌아와 대청마루를 오르던 하녀가 갓난아이를 댓돌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렇게 구본웅은 꼽추가 되었다.


서산 구본웅 (1906~1953)


사소한 특징도 놀림거리가 되는 아이들 사이에서 등이 굽은 구본웅은 따돌림을 당하기 일수였다. 이상은 타고난 것이나 다름없는 구본웅의 불행에서 자신의 불행을 봤다. 그 불행을 비집고 드러나는 그림을 향한 열망도 봤다. 두 사람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구본웅에 이어 또 하나의 운명적 만남이 이상을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신명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상은 12세가 되던 1921년 동광학교에 입학한다. 1922년, 동광학교가 재정 문제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통합되며, 이상은 고희동과 만나게 된다.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서화협회 창립회원이자 보성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보성고보 3년학이 되던 해, 교내 미술전람회가 열린다. 여기서 이상의 작품이 1등을 차지한다. 제목은 '풍경'.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화풍은 짐작 가능하다. 심사위원이었던 고희동은 인상파와 가까운 그림을 그렸고, 자유로운 표현을 강조하는 작가였다. 이상의 그림도 그 취향에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 이상의, 어떠한 감정이 담긴 풍경화였을 것이다. 어린 이상의 짙은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강렬한 풍경화였을 것이다.


보성고보 시절 이상


이상은 미술전람회 1등 부상으로 유화구 한 세트를 받았다. 그는 그 유화구를 들고 고심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큰아버지에게 알리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친아버지는 어떨까?' 이상은 알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구도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 무렵, 이상 집안의 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총독부 기사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친아버지는 물론, 큰아버지의 형편도 점점 나빠지게 되었고, 이상이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선 학교에서 현미빵을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칠판에 만화를 잘 그려서 우리들을 실컷 웃게 하는 일도 있었죠. 나는 해경에게 매우 다정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는 고학생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우리 몇 사람은 그 애가 파는 빵떡을 일부러 사 먹은 일이 있었지요.

보성고보 동창생 김상기


이상을 둘러싼 상황은 점점 나쁘게 돌아갔다. 장남인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학교에선 촉망받는 미술학도가 됐고, 큰아버지 앞에선 집안을 일으켜 세울 모범생이 되어야 했다. 그 괴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이상은 자신 속으로 파고들었다.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십이월 십이 일(1930)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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