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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Nov 09. 2019

문인을 꿈꾼 소년

구보

이상 김해경과 구보 박태원. 나는 절망의 무대 경성에서 낭만을 연기한 두 사람을 좋아한다. 이상은 언제나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고, 구보는 언제나 헤헤 멋쩍게 웃었으나, 둘은 언제고 울고 있었다. 


홀로 있을 때보다 나란히 놓았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이상과 구보도 그렇다. 둘은 따로 볼 때보다 함께 있을 때 선명해진다. 천재 이상과 모더니스트 구보. 그들의 불안과 고뇌, 낭만 그리고 문학을 엿보고자 둘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기로 했다.




문인을 꿈꾼 소년


구보는 8살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다, 10살 때 지금의 초등학교 격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들어간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이였다. 특별한 게 있다면 형 진원과 함께 입학했다는 것이다. 구보에게 형 진원의 존재는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다. 장손으로 차출되어 가문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져야 했던 이상과 달리, 구보에게 주어진 가족의 짐은 미미했다. 형 진원 덕분이다.


구보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누군가는 약방이라는 가업을 이어야 했는데, 맏아들 진원이 일찌감치 그 역할을 도맡았다. 진원이 장남으로서 부족함이 없기도 했고, 동생 태원(구보)의 몸이 어려서부터 약해 의학 공부는 무리라는 판단도 있었다. 덕분에 구보의 어깨는 가벼웠다. 형 진원은 후에 경성제대 조선약학과에 들어갈 정도로 성적을 유지했던 반면 구보는 문학에 빠져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구보는 명랑했다. 학교에서는 이야기꾼이 되어 밤새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곤 했다. 밤에 책을 무섭게 읽어대서 시력은 점점 나빠졌지만, 구보는 자신의 이야기로 관심을 끄는 게 좋았다. 한 번은 집안 가득 말려놓은 약재를 학교에 가져다 뿌려, *구보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21년, 경성제대 의학부 해부학 교실에 있던 해골 하나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대 교수였던 구보(久保) 교수가 "조선인은 해부학상 야만인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너희들이 가져간 것"이라는 망언을 한다. 이에 조선인 학생 194명 전원이 수업거부에 나선 것이 '구보 망언 사건'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말하자면 박태원을 놀리기 위해 친구들이 구보라 부른 것인데,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 후에 박태원이 이를 아호로 사용한다. 단 구보의 음만 따오고 한자는 원수 구(仇)에 클 보(甫)를 사용했다. 자신과 평생 상대할 문학을 적, 원수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구보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타고난 실력인지, 왕성한 독서가 바탕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구보는 1922년 형 진원과 함께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한다. 당시 최고의 고등학교로 손꼽히며 경쟁률이 40:1에 달했던 경성제1고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제법 소년 티를 벗은 구보는 읽는 것, 읽은 것을 재미있게 전하는 것 이상을 원하기 시작했다. 창작욕구가 차오른 것이다. 그는 경성제1고보의 문학소년들을 모아 문학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후에 구보는 이 시기에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보는 꾸준히 습작을 이어가며 잡지에 투고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경성제1고보 2학년이던 1923년. 구보의 글이 처음 활자화된다.


쓸쓸한 바람이 우리의 등을 치고 나아간다. 나는 껌껌한 산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김군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이때까지 움직이지도 아니하고 움직이려도 하지 않던 달이 갑자기 우리의 머리 위로 쫓아온다. 중천에 뜬 채로......

달마지(1923.4) / 박태원 


시사잡지 <동명>의 끄트머리, 소년칼럼란에 실린 짧은 글이었지만 구보에게는 값진 한걸음이었다.



운명적 만남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선회한다. 식민지 수탈이라는 목표는 변화지 않았지만, 그 방식을 '노골적'에서 '기만적'으로 바꾼 것이다. 출판법과 언론법 완화로, 조선인의 목소리를 담은 매체가 등장한다. 1920년 창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잡지 <개벽>이다.


집에 다달이 <개벽>지와 <청춘>지가 왔다. 나는 그것들을 주워 읽었다. 그러자 <조선문단>이 발간되었다. 나는 내 자신 이것을 매월 구하여 가지고는, 춘원 선생의 '혈서', 'B군을 생각하고', '상섭 선생의 '전화', 빙허 선생의 'B사감과 러브레터', 동인 선생의 '감자'등을 흥분과 감격 속에 두 번씩, 세 번씩 거듭 읽었다. 

춘향전 탐독은 이미 취학 이전(1940.2) / 박태원


<개벽>, <청춘>, <조선문단>


<개벽>은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 교양 잡지다. 시사, 사건 사고, 문학, 교양 등을 두루 다루었는데, 매달 평균 8천 부를 팔아치울 만큼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다. <청춘>은 최남선이 발행한 잡지로, 서양 사상과 서양 문학을 주로 다뤘다. <조선문단>은 문예지로 춘원 이광수의 '문학개론' 등을 연재한 잡지였다. 구보가 한창 자라던 1920년대는 


구보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잡지의 시대'를 만나 신소설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었다.


문학의 뜻을 세운 구보는 매일 읽고 또 썼다. 문학도는 으레 가족의 근심 덩어리로 전락하기 마련이지만, 구보는 예외였다. 그의 '모던패밀리'는 진지하게 문학에 임하는 그를 지지해줬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움도 줬다. 특히 서양의사인 작은아버지와 이화여고 교사인 고모가 언제나 구보의 편이 되어주었다.


나의 숙부와 양백화 선생과는 잘 아시는 사이였다. 양 선생은 이 문학소년에 흥미를 느끼시고, 때때로 명하여 글을 짓게 하시었다.

(...)

내가 춘원 선생의 문을 두드린 것은 아마 소화 2년인가, 3년 경의 일이었던가 싶다. 두 번짼가 세 번째 찾아뵈었을 때, 나는 두어 편의 소설과 백여 편의 서정시를 댁에 두고 왔다. 그중 수 편의 시와 한 편의 소설이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되었다. 

춘향전 탐독은 이미 취학 이전(1940.2) / 박태원


구보가 18살이 되던 해, 작은아버지 박용남은 그에게 당대 최고의 중문학자이자 소설가인 백화 양건식을 소개시켜 줬다. 고모 박용일은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을 통해 춘원 이광수와 구보가 만날 수 있게 도왔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춘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대 최고의 글쟁이였다.


춘원 이광수 (1892-1950)


그렇게 구보는 당대 최고의 작가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으며 문학을 배웠다. 특히나 춘원은 구보에게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구보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도에게, 1937년 노골적 친일을 저지르기 전까지의 춘원은 자유연애와 민족 계몽을 주창하는 최고의 스타였다(춘원의 별명은 '만인의 연인'이었다). 꿈에만 그리던 춘원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여러 조언을 들은 문학소년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세상이 구보를 돕고 있었다. 매일 읽고 또 쓰고, 가르침 받는 기쁨의 연속이었다. 잠을 줄여가며 늦은 밤까지 책을 끼고 읽었다. 그럴수록 건강은 나빠져 갔지만, 매일 문학에 깊게 젖어들었다. 구보는 점차 문인의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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