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과 완결편밖에 보지 못한 슬레이어즈
내 나이 또래의 애들이라면 누구나 마법소녀 리나와 마법기사 레이어스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 두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집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리나와 레이어스가 방영하던 당시 아버지는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상 시간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여섯시 뉴스를 보셨다.
이 여섯시 뉴스는 당시 나에게 악의 대마왕 같은 존재였다.
마법소녀 리나의 오프닝을 몇 초 정도 보면 뉴스가 시작했다.
그리고 뉴스를 다 보고 돌아오면 다음화 클립 몇 초와 엔딩 크레딧이 떴다.
때로는 반쯤 잘린 엔딩이 뜨기도 했다.
레이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오프닝과 엔딩을 보면서 이게 무슨 내용일까 상상하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날실과 씨실을 걸어 엉성하게 이야기를 짜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캐릭터가 어떤 일을 할지 상상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했다.
종종 위험한 지명수배범이 나타나거나 계엄령이 뜨면 아버지 퇴근이 늦어지시는 날도 있었다.
그럼 애니메이션을 조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몇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세일러문 한두 편
슬레이어즈 1기 1편, 마지막편
슬레이어즈 2기 반 편
슬레이어즈 3기(트라이) 서너 편 (중간중간 토막토막)
그래서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상은 토막토막 엉켜 있다.
리나가 가우리와 함께 모험을 떠나고 나서 그리고 갑자기 금빛 악몽에 빙의당해서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소녀 같은 복장을 입은 제르가디스와 리나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느닷없이 등장한 바르가브가 절망하여 울부짖는다. 휘리아는 꼬리를 펄럭이면서 모닝스타를 휘두르고, 제로스는 생긋 웃는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리나는 악당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는 세상을 멸망시키고 파괴하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다른 친구들은 리나를 구하기 위해서 모험을 떠난다...
아버지께서 무자비하게 채널을 틀어 버리셨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궁금했던 그 이야기들 사이의 간극을
상상해서 메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
때로는 부족한 것이 더욱 좋은가보다.
아참,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어렸던 나에게
"지금 네가 이 만화를 보지 못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라고 하면
화를 낼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