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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Apr 19. 2016

제주도 겉핥기

2016년 봄 #3 둘째 날 오전

여행 둘째 날이 밝았지만 커튼을 친 방안은 어두웠다.

일곱 시가 약간 넘은 시각에 저절로 눈을 떴다. 우리 둘 다 엄청 열심히 여행을 다니는 성격은 아니라, 여덟 시쯤에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일어날 만한 시각에 일어나서 나갈 만한 시각에 나가자고 협의를 봤는데 말이다. 늦잠을 못 자서 약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밥도 설렁설렁 먹고 아침에 느릿느릿 준비를 하는 편이라서 눈 뜬 김에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여행까지 와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그다지 없을 듯하지만 의외로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슬쩍 커튼을 걷어보니, 웬걸, 벌써 해가 앞 건물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혼자 거실에서 어슬렁대다 보니 방에서 자던 H도 거실로 나와서, 어제 사 왔던 한라봉 빵과 H가 용감하게 프런트와 교섭하여 얻어온 커피 믹스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로비에 놓인 가구. 방안 가구에 초천연색 페인트칠을 해둔 이유는 세월과 함께 이런 느낌이 나기를 기대한 것일까 진심으로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의 일정은 중문관광단지부터다.

출발하기 전에는 제주도가 넓다는 건 이론적으로 알고 있을 뿐 느낌으로는 무척 작은 곳 같았고, 게다가 애월이 어디쯤에 붙어 있는 해안가인지도 몰랐던지라, 둘 다 면허도 없으면서 숙소를 고정하고 활동하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외진 숙소라 어차피 택시는 불러야 하고, 택시를 타고 번화가까지 나가서 버스를 탄다 해도 갈아타기까지 해야 하는 데다 한참을 가야 한다고 하니, 택시를 타고 중문까지 가서 일정을 시작하는 게 그나마 낫지 않나. 적어도 오늘은 먼 거리를 가게 되니까 면박을 당할 일은 없겠지.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정당화하고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딸이 일산에 산다는 아저씨가 우리를 데리러 왔는데, 한동안 앞에서 가던 차가 계속 헤매며 브레이크를 찔끔찔끔 밟다가 앞지르려 하면 자기도 속력을 높이는 터라 혹시나 사고가 날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어느새 택시 안에서 나 홀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야자수가 양쪽 옆으로 죽 늘어선 중문관광단지 안을 달리고 있었기에 H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물론 H는 몹시도 쿨하게 "저는 낮잠을 안 자서요."라고 했지만, 뭔가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못해 회사 쉬고 놀러 온 사람에게까지 아침부터 전화해서 정확한 볼일도 이야기하지 않고 다음에 시간 내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다니 신경 쓰이겠다는 생각만 하고 자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나는 일정 내내 교통수단에만 탑승하면 잠이 드는 일을 반복했으니.


아무튼 중문관광단지에 도착하자 날씨도 화창해서 기분이 좋았다!

알고 보니 이날은 서울보다 제주의 미세먼지가 높았다. 어쩐지 막 맑지는 않았어.


중문관광단지란 그냥 걸어 다닐 수 있는 관광지의 집합소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더니 엄청나게 넓은 구역에 조성된 곳이었다. 그러니까 조사라도 좀 하고 오지 싶었는데, 어쩔 수 있겠나 이미 온 것을. 일단 H가 가고 싶다고 했던 테디베어 박물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정문 앞이 한창 공사 중이라 땅 파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박물관에 오기 전에는 테디베어에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데다 나 혼자 일정을 짰더라면 아마 그 존재 자체를 몰라서라도 절대 넣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박물관이나 전시장이 대부분 그러하듯 막상 와 보면 구경할 게 제법 있다. 여행은 누구와 오느냐에 따라 보고 오는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 내 머릿속에는 테디 베어가 한가득.


곰인형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곰인형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일종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털 색깔이 바래고 숱이 줄 때까지 물고 빨던(비유적 표현이다) 우리 집 곰인형에서 기인한 거라 생각되는데, 여하튼 아무래도 사람 인체 비례까지 몸을 길게 늘인 테디베어들에게는 정이 가지 않았다. 특히 풍만한 가슴까지 성실하게 재현해 놓은 짤막한 드레스 차림의 테디베어들은 음……. 가장 인상적이었던 테디베어는 밑에 낙찰가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던 루이뷔통 테디베어. 그를 대표하는 특징이 낙찰가라는 뜻이겠지만, 다른 아이들의 팻말에는 연도나 종류 및 특징을 적어두었는데 반해 그의 경우는 이름이 있어야 할 가장 위쪽 자리에 가격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아, 너의 이름 몇 억이니. 뭐 그런 느낌이었다.


박물관을 보고 나오니 꽤 좋은 시간대라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무슨 해녀의 집 어쩌고 하는 곳이었는데, 찾아보니 버스를 타도 조금쯤 걸어야 한다는 말이라, 테디베어 박물관 맞은편에 있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음료를 두 잔 사서 걸어가기로 했다. 

양산이라도 가져올걸 그랬다.


정말 가끔씩만 사람이 걸어서 지나다니는 길을 한참 걸었다. 다리도 건너고 골목 따라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곧바로 바닷가가 펼쳐질 것 같은 곳도 지나갔다. 유채꽃이 피어 있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위로는 통통배가 별빛을 뿌리듯 스르르 미끄러져 가고, 햇살은 완연한 봄처럼 따사롭고, 공기는 완전히 맑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울에 비하면 깨끗한 편이고, 시야는 확 트이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고, 그리고 길은 엄청나게 멀었다.


겨우 근처까지 오기는 했는데 또 길을 헤맸다. 포털 사이트의 길찾기 앱이 알려주는 대로 남의 호텔 정원으로 일단 들어가서 길을 찾아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여기서부터는 객실이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표지판밖에 안 나오는 거다. 주위를 한참 둘러본 끝에 화장실 옆에서 네가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아마 90퍼센트의 사람들은 그게 길이라고 도저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라 짐작되는 폭 20cm 정도의 수풀이 살짝 우거진 틈새를 발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쪽으로 지나가는 건 풀벌레들이 좋다고 우리를 뜯어먹을 것 같아서 약간 내키지 않았기에, 다른 쪽 계단으로 돌아 내려가 '공사 예정 부지입니다' 표지판 옆을 지나서 호텔 정원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앗! 테트라포드다!"

길에 내려선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얀 콘크리트 벽 너머로 테트라포드가 죽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전에 일본의 탤런트 누군가가 집에 테트라포드를 하나 사두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일단은 가볍게 사진 하나 찍은 다음, 밥부터 먹기로 하고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하얀 콘크리트 벽을 따라 무슨 해녀의 집인가로 향했다.


안은 복잡했다. 사람도 너무 많았고. 그리고 지나가는 할머니를 불러 세우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얼마간 기다리며 "여기요!"를 외치다 못해 H가 할머니에게 직접 가서 주문을 시도했다. 그러더니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단체 손님이 와서 주문 못 받는다고 하시네요."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옆 테이블 남자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희 한 시간이나 기다렸어요!"라 외치는 거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나요?"라는 물음에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글쎄 모르겠어." 했다. 남자분은 화를 낸다기보다는 허탈감에 웃는 표정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짤막한 대화를 들은 좌석 쪽에 앉아있던 다른 일행의 여자분이 외쳤다. "저희도 한 시간 넘게 기다렸어요!" 그러고 나서 저마다 이런저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는데……, 혼돈의 카오스란 이런 걸 일컫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조용히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거기 할머니들이 물질을 오래 하셔서 주문은 큰소리로 해야 하고, 단체 손님이라도 있으면 엄청나게 기다려야 한다는 애정이 담뿍 담긴 블로그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긴, 화를 내기도 애매하고 굳이 따지면 허탈감에 가까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가 아니라 나는 콘크리트 벽 한쪽에 내어 놓은 틈을 통해 바닷가로 나갔다.

검고 커다란 돌로 가득 찬 바닷가


바람도 시원하고 바닷물은 반짝반짝. 우연히 찾아온 곳에서 뜻하지 않은 좋은 풍광을 목격할 수 있어서 의도했던 모둠회를 먹지 못한 것도 그리 아깝지 않았다.

짙은 파랑 바탕에 갈색 조끼를 입은 듯했던 새. 바닷가에서 두 번 봤다.


하지만 배는 고프니 밥을 먹으러 가자.

우리는 아까 통로로 이용했던 호텔로 올라가서 그 안에 있는 레스토랑을 이용하기로 했다. 인터넷에 그리 평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편인 듯하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이름 있는 리조트 안에 있는 식당인데 그리 맛이 없기는 하겠나 싶기도 했다.


종종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추천을 받아 주문한 해물 크림 스파게티는 전혀 간을 안 한 것 같았고(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다는 맛있겠다), 해물 뚝배기는 뭐 그냥 해물 넣은 뚝배기였다(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다는 맛있겠다). 가격이 가격인지라 허탈한 웃음만 나왔는데, 점심을 시킬 수 있는 샐러드바에 놓여 있던 파인애플이 조금 맛있었으니 괜찮……긴 무슨,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이쯤 되면 우리의 입맛이 까다로운 건지 제주도의 소위 맛집이나 괜찮다는 집들이 실은 전혀 맛이 없는 건지 의심스러워진다. 심지어 나와 H는 "제주도에서는 원래 간을 잘 안 하나 봐.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려고 일부러 그러나?"라는 결론까지 내릴 뻔했다.


맛없는 걸 먹어도 배는 찬다. 이제 주상절리를 보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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