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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08. 2017

3월의 교토는 디저트와 함께

봄의 문턱에서 #1

다시 교토에 다녀왔다.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약간 무리해서 잡은 일정이었는데, 그쪽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항공권과 숙박 예약 취소에 들어갈 비용도 아까웠던 데다 교토는 언제라도 가고 싶은 곳이기 때문에 그냥 다녀오기로 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좋아하는 곳들을 다닐 수 있어서 좋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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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오사카도 공기가 깨끗했는지, 공항에서는 맑고 선명한 석양을 볼 수 있었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들 생각하는 건 비슷한 모양이다.


교토까지는 하루카를 타고 갔는데, 막상 내리려고 보니 짐칸에 캐리어 바퀴가 끼여서 도통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의 대가족 여행자로 짐작되는 무리가 열차에서 줄지어 내리는 가운데 동행이 홀로 낑낑거리면서 바퀴와 분투하고 있었더니, 그 일행 중 몇몇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결국 마지막에 내리던 분이 힘으로 바퀴를 밀어내 주셔서 겨우 캐리어가 빠졌다. 어차피 남의 일이니 그냥 무시하고 나가도 될 것을,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도와줄까?" 물어보는 게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동행이 땀을 흘리며 바퀴와 싸우는 동안에 "어차피 종점이니까 안 서둘러도 돼. 나중에 청소하러 들어오시면 부탁해보자" 같은 말을 하며 한쪽에 서서 팔짱 끼고 서 있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진짜 팔짱을 끼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나중에 역무원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거지, 사람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나서 줄 줄 누가 알았겠어…….


교토역에는 7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동행은 지인을 만나러 가고, 나는 혼자 근처 이세탄 백화점으로 향했다. 원래는 갈레트를 먹으러 가려했지만 그 가게는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데다, 숙소 근처의 퀼페봉도 8시에 문을 닫으니 타르트를 테이크 아웃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마감 세일을 하는 이세탄 지하의 푸드 코너를 몇 바퀴 돌아본 끝에 냄새에 이끌려 규슈산 닭고기와 연근으로 만든 무언가를 구입했다. 뭔가 남방즈케南蛮漬け 같은 맛이었는데, 연근은 그럭저럭 맛있었지만 닭고기는 기름이 전혀 없어서 연방 차를 마셔도 목이 마르기에 두 개 정도밖에 못 먹었다.

다 못 먹고 남긴 음식은 나중에 사진으로 보면 먹고 싶어진다.

저녁거리를 구입하고 나서, 이어서 오늘의 디저트를 구입하기 위해 다른 플로어를 빙글빙글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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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토 여행에서는 1일 최소 1 디저트 실현을 목표로 움직였다. 늦게 도착한 탓에 첫째 날은 케이크 숍에 갈 수는 없게 되었으니 이세탄 지하에서 뭔가 하나만 사보기로 했다. 역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곳은 앙리 샤르팡티에. 도쿄에서 일하던 시절, 나에게 마카롱은 맛있는 음식임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곳이다. 금/은 두 종류의 몽블랑과 레몬 타르트를 자주 사 먹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는데, 가까이 가서 진열장을 보니 몽블랑은 한 종류밖에 없고 레몬 타르트는 아예 없었다. 그러하니 패스.


캐리어를 끌고 빙글빙글빙글빙글 돌아다니면서 시간만 낭비하다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에는 목표를 좁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종류의 케이크가 가장 먹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니, 역시 상큼한 계열이었다. 말하자면 레몬 타르트 같은 것. 앙리 샤르팡티에를 패스한 것도 레몬 타르트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니까.


그리하여 케이크는 안테노르ANTENOR로. 평소에 막 엄청 좋아하던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레몬 타르트와 데코퐁 디저트가 계속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레몬 타르트와 데코퐁과 오렌지의 레어치즈.

레몬 타르트의 위에 얹혀 있는 머랭이나 밑에 깔려 있는 크림에 뭔가 색다른 품을 들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먹어보니 그냥 평범한 머랭이고 생크림이었다. 가운데 있는 건 보이는 그대로 화이트 초콜릿 덩어리였고. 타르트 과자를 채우고 있는 레몬 커드 자체는 맛있었지만, 웬만한 레몬 타르트도 그 부분은 맛있는 법이니까.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 보통이려나.

데코퐁과 오렌지로 만든 레어 치즈 케이크는 상큼하고 달달해서 꽤 맛있었다. 위에 얹은 과일은 데코퐁보다는 오렌지가 많은 것 같았지만, 닭고기를 먹어서 느끼해진 내 입을 달래 유지해 주기에는 딱 적당한 상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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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죠 역에서 나와 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랑비 정도로 내리는 것 같아서 우산을 펼치지 않았더니 순식간에 바닥에서 물이 튈 정도로 굵은 빗방울로 변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교토의 날씨가 변덕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라서 어쩐지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도쿄의 회사를 그만두고 교토에서 몇 달 지내는 동안,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팔이 빠져라 무거운 수박을 들고 산죠 오오하시를 건너올 때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던 후회와 짜증은 이제 떠올리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그 뒤로도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교토를 다시 찾아오면 그리움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홀로 일하러 다니던 도쿄보다는 교토에 훨씬 많은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여유롭고 느긋했던 내 삶의 몇 달 간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근처에서 산보를 하다가 산죠 오오하시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모가와를 바라보며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나 느긋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그런데 교토에 다시 가보니 똑같은 다리 위에서 비가 섞인 날이 선 바람을 맞고 있으니, 어찌나 내가 그때의 그 여유로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지. 

비 오는 산죠오오하시三条大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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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쯤 울적한 기분으로 앉아 있다가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아직도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않은 개그맨들이 대거 출연하여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나를 웃겨 주었다. 아이모드라니, 불과 몇 년 전인데도 정말 그리운 명칭이 되어 버렸네. 물론 난 au를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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