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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14. 2017

3월의 교토는 디저트와 함께

봄의 문턱에서 #2

날씨가 좋은 아침이다. 

가모가와 저쪽 끝으로 하늘빛이 약간 흐릿했지만 그래도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교토에서는 언제나 구름이 나지막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사실은 나올 때 찍은 사진.

늦게 일어나서 미리 예약해둔 스테판 판텔Stephan Pantel에 갔는데,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프렌치를 먹을 수 있다고 호평을 받는 곳이었다. 영업시간이 12시부터라 우리도 12시부터 예약을 넣었고, 가서 보니 다른 손님들도 대략 그 시간대에 예약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카운터석으로 안내되어 처음에는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요리나 플레이팅을 쭉 지켜볼 수 있어서 굉장히 즐거웠다. 디저트를 제외하고는 셰프가 직접 요리를 내어주며 설명도 해주어서 어쩐지 재밌는 체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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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맛있었는데 사진은 왜 이런가...

애피타이저는 훈제한 반숙 달걀과 삶아서 그릴에 구운 아스파라거스에 올리브유와 프랑부아즈 소스를 곁들여 먹는 요리였다. 프랑부아즈와 달걀이 과연 어울릴까 싶었는데, 웬걸 정말 맛있었다. 아스파라거스야 뭐 말할 필도 없고.


다음으로는 이 가게의 대표 메뉴인 푸아그라 콩피가 나왔는데, 나라즈케奈良漬け로 얇게 싸서 하룻밤 재운 것을 잘라 다섯 종류의 남국 과일로 만든 소스를 곁들여 먹는 요리라 했다. 일단은 소스가 새콤하고 달콤해서 정말 맛있었고, 푸아그라는 아마 좋아하는 사람이 먹는다면 감탄하면서 먹을 요리일 것 같았다. 푸아그라라 하면 내가 먹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프렌치 레스토랑에 예약을 할 때면 항상 빼 달라고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 가게의 대표 메뉴인지라 왠지 빼 달라고 하기가 민망해서 그냥 받아 들기로 했는데, 빵과 함께 먹으니 예상 밖으로 먹을 만했다. 마지막에는 약간 무리해서 먹은 데다 나라즈케의 시큼함으로 살짝 눌러놓았다고는 하나 내가 싫어하는 동물성의 크리미한 맛이 많이 나서 "앗, 이 요리를 계기로 저는 푸아그라를 먹게/좋아하게 되었습니다!"까지는 절대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도중에 포크를 내려두고 항복 선언을 하지 않을 정도이기는 했다. 접시도 깔끔하게 비웠고.


정말 맛있었던 스프와 생선 요리.

세 번째 요리는 수프로, 아래쪽에는 구운 표고버섯이 들어있는 새우 다시로 만든 부드러운 젤리층이 있고, 위쪽에는 키쿠이모菊芋(돼지감자)로 만든 수프가 들어 있어서 떠먹을 때 조금씩 섞어 먹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먹은 푸아그라의 느끼함을 완전히 잡아주는 깔끔한 수프였는데, 약간 료칸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일본풍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수프 위에는 무슨 소스를 곁들였다는 설명도 해주었지만, 프랑스어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맛있다는 감상만. 


슬슬 배가 부르기 시작한 시점에서 등장한 네 번째 요리는 생선. 도미를 쪄서 그릴에 살짝 구운 것에 다양한 종류의 교토 채소와 거품을 낸 으깬 감자가 함께 나왔다. 요리를 올려준 뒤에 크레송이나 미즈나 따위의 풀로 만들었다는 소스를 한쪽에 살짝 끼얹어주는데, 그것만 맛보면 테니스의 왕자에 나오는 이누이 즙이 이런 맛이려나 싶을 정도로 씁쓰레했지만 요리 및 감자와 함께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으깬 감자도 그냥 만든 게 아니라 프랑스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쉽게 말해 발효 밀크와 엇비슷한 무언가를 섞어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비결이려나. 살짝 찐 교토 채소들이야 뭐, 하나하나 꼭 집어 말할 필요도 없이 정말 맛있었고.


아, 저 양배추 찜은 정말 맛있었는데!

조금만 더 힘을 내라는 것인지 드디어 메인 요리가 나왔다. 교토 가메오카산 돼지고기로 만든 두 가지 요리로, 하나는 로스, 다른 하나는 숙성시킨 고기를 봄 양배추로 싸서 쪄냈다고 했다. 소스는 직접 만든 미소 된장. 거기에 알자스 지방의 뇨끼라는 게 곁들여 나왔는데,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건 단연 양배추 찜이었다. 원래부터 양배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안에 들어있는 돼지고기가 어찌나 맛있던지. 반을 잘라 입에 넣고 동행을 쳐다보았더니 나와 똑같이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인까지 깔끔하게 해치운 뒤에 디저트가 나왔다. 요거트 아이스크림과 커스터드 같은 크림에 딸기와 프랑스 과자를 곁들인 것으로, 점점이 뿌려놓은 소스까지 깔끔하고 맛있었다. 다만, 처음으로 셰프가 아닌 다른 직원의 설명을 들었으나 목소리가 너무 작으셔서 잘 안 들리더라……. 디저트를 다 먹은 뒤에 커피를 주시던데, 또 집어먹을 수 있는 다과라는 걸 두 점 내어 주셨다. 아마도 술에 절였을 것 같은 체리(입에 넣고 씹다가 취할 뻔했다)와 바삭한 쿠키 모두 깔끔하고 맛있었다. 이걸로 코스는 끝. 먹는 데만 두 시간 반을 썼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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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판텔에서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요즘 교토에서 꽤 호평을 받고 있다는 디저트 가게가 있다. 밤에는 프렌치도 한다고 하는데, 가격대가 약간 있다고 들어서 이번에는 디저트만 하나 고르기로 했다. Assemblages Kakimoto라는 곳인데, 가게 이름을 딴 Assemblages a나 b 혹은 몽블랑이 유명하다고 들었지만 막상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매진이었다. 가기 전에 요즘 인기가 꽤 많아서 평일에도 케이크가 빨리 품절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오후 두 시 반 정도 됐을 때였는데 벌써 그렇다니 약간 아쉬웠다.

이래 봬도 진짜 맛있다.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ZEN이라는 무스 케이크를 포장해 왔는데, 안에 팥과 찹쌀이 들어있어서 약간 화과자 같은 느낌을 주지만 정말 깔끔하고 맛있는 케이크였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저녁에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한두 개 더 사 올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다음에 갈 때는 조금 일찍 가서 인기 메뉴 쪽도 맛을 보겠다는 결심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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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교토에 왔으니 파티스리 에스Patisserie-S는 무조건 가야 된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또 길을 나섰다. 네 시 반 경에 도착해서 이제 별로 디저트가 남아 있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가서 보니 정말로 모두 술이 들어간 케이크로만 네 종류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약간 고민하다가 일본주가 들어간 에가르라는 케이크와 얼그레이 홍차를 부탁했다.

석양이 들어와서 약간 눈이 부셨다.

하얀 크림 밑까지 스푼을 넣으면 피스타치오와 일본주로 만든 무스가 두 층으로 나뉘어 들어있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에는 일본주 향이 너무 강하게 나서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정말 독특하고 맛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이라고 할까. 동행이 피스타치오를 좋아한다면 사다 주고 싶을 정도였는데, 혹시 피스타치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이미 진열장에서 모습을 감춘 뒤라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피스타치오와 호지차 마카롱 두 개에 실어서 돌아왔다. 이곳의 마카롱은 예전에 선물로 받아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마카롱의 맛을 점점 알아가던 나에게는 거의 색소가 들어가지 않아서 희멀겋한 외관이 꽤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겉보기에만 희멀겋지, 막상 먹어보면 정말 맛있다. 색소 맛이 배제된 깔끔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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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내내 먹기만 하는 것 같지만, 그러고 나서는 동행과 만나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첫째 날에 가려고 했던 갈레트 카페에 갔는데, 오지 않던 기간 동안 주종목이 갈레트가 아니라 다양한 무언가(뭐든 있습니다!)로 바뀐 듯해서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왔으니 일단 시키기로 하고 네 개밖에 없는 갈레트 메뉴 중에서 아보카도와 게살이 들어간 걸 선택했는데, 한 입 먹어보자마자 그냥 반숙 달걀이 올라간 기본 갈레트를 시킬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과연 그 기본 갈레트도 맛이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반숙 달걀과 토마트 소스가 있으면 대체로 기본은 하니까. 게다가 갈레트 한쪽 구석에서 짧은 머리카락까지 나왔으니, 아마 이 카페가 계속 있다 해도 교토에 다시 왔을 때 또 가지는 않을 것 같다. 맛있는 갈레트는 어디로 가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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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찝한 기분으로 밖에 나와서 오래간만에 서점에 가서 사전 조사 없이 신간과 문고본을 살펴보다가 몇 권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오늘의 일정이 끝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기-다음 먹을 곳으로 가기-먹기를 되풀이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피곤했던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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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 보니 정말로 먹었던 이야기밖에 안 쓴 것 같은데, 사진을 꼼꼼하게 쭉 살펴봐도 정말 하루 내내 먹었던 사진과 풍경 사진 몇 개밖에 안 남아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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