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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15. 2017

3월의 교토는 디저트와 함께

봄의 문턱에서 #3

오늘은 혼자 교토를 산책하는 날이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또 가고 싶은 긴카쿠지銀閣寺와 난젠지南禅寺만 일정에 넣고, 아침에 느지막이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 짐을 맡긴 뒤에 밖으로 나왔다.


#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점심 겸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예전에 교토에서 반년 정도 생활했을 때에는 산죠 근처에 살았는데, 종종 시장을 보러 가곤 했던 마트 근처에 꽤 인기가 있고 맛도 괜찮은 디저트 가게가 있다고 하여, 추억을 곱씹을 겸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로 했다. 구글의 견해에 따르면 거리는 1km, 도보 11~12분 거리.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느릿느릿 걸어서 kashiya에 도착했는데, 오픈 시간인 11시에 맞춰서 갔는데도 정작 가게 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조그마한 칠판에 적힌 오픈 11:30이라는 글자. 아무것도 없는 주택가라 이리저리 서성거려도 볼 것은 없지만, 오랜만에 눈에 익은 골목길을 걷고 있으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30분을 그냥 낭비할 수는 없으므로 한 블록 정도 걸어가서 일단 쟈스코에 들러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맥주를 사서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내린 결단 때문에 나는 하루 내내 관광을 하면서 도합 2리터 정도 되는 물을 하루 내내 어깨에 메고 다니게 되는데……. 그날 저녁 무렵에는 묵직한 어깨를 주무르며 왜 마트에 미리 들렸을까 후회했지만, 서울에 돌아와서 맛있게 폰즈를 찍어 먹고 있으면 역시나 참 잘한 결정이었지 싶다. 사람은 간사한 법이다.


아무튼 마트에 들렀다 돌아오니 가게가 문을 열었고, 내가 첫 손님이었다.

메뉴는 계절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고, 디저트 종류는 보통 1200엔, 커피는 500엔 선에서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감귤류를 워낙에 좋아하는 터라 '금귤과 캐러멜 디저트'를 부탁했는데, 조금 있다가 직원(점장?)이 와서 몇 시 정도까지 다 먹어야 한다거나 뭐 그런 계획이 있냐고 묻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32번 버스를 타야 하니 12시 23분이나 12시 53분 버스를 타고 싶어요"라 대답하자, "실은 저희 잘못으로 이 디저트에 꼭 필요한 무언가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걸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거든요" 했다. 굳이 필사적으로 그 디저트를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 데다가 가게 쪽에 서둘러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내가 황급히 먹어치워야 하는 상황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메뉴판을 다시 달라고 해서 '딸기와 베르가못 디저트'로 바꾸었다. 듣자 하니, 금귤 디저트는 어젯밤에 겨우 시식을 끝내고 오늘부터 개시하는 메뉴라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심결에 빙긋 웃으며 "딸기 디저트도 맛있죠?"라 물었는데, 그게 길고 긴 대화의 시작이 될 줄이야. 점장의 "쉽게 맛있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맛있다는 건 주관적인 거라, 나중에 '맛있다고 해서 먹었는데 맛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는 거고요. 호평이라는 말은 할 수 있겠죠"라는 말에서 시작된 대화는 딸기의 품종, 복숭아, 망고, 머스캣, 과일의 당도, 사쿠라모치, 화과자에 관한 화제를 쭉 훑고 "사람들이 저한테 길을 참 많이 물어보거든요"에 이르기까지, 실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화제로 이어졌다. 내가 다 먹고 나가기 전까지 포장 손님이 두 사람 왔을 뿐 줄곧 나 혼자 있었던 터라, 문득 내가 시계를 보고 벌써 12시 51분이 되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짐을 챙겨 계산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대화는 거의 끊기질 않았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 가게를 추천해준 지인이 갔을 때에도 옆에 있는 손님에게 줄곧 말을 걸었다고 하니, 조용히 디저트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가게인 듯하다. 실제로 나도 디저트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는 없었기도 하고.


그리하여 정작 중요한 디저트는 어떠했냐 하면, 테이블마다 놓인 "No Photo" 경고 때문에 사진을 찍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도 사정이 있다는데, 자기 테이블에서 얌전하게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접시를 든 채 가게 곳곳을 배회하며 인터넷에 올리기에 더 적합한 곳을 찾아다니는 손님들이 왕왕 있어서, 내버려 두었다가는 얌전히 디저트를 즐기는 손님들에게까지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진을 찍는 손님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고문이 있으니 자기 자리에서 살짝 몰래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정도의 효과만으로도 만족해야 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내가 사진을 '살짝 몰래' 찍을 수가 있겠는가. 허허.


아무튼 디저트는 얇게 구운 바삭하지 않고 부드러운 종류의 크레페에 생딸기와 소보루, 아이스크림, 설탕과자를 올리고(손으로 싸 먹으라고 한다), 취향에 따라 라즈베리 소스를 찍어먹거나 물리면 베르가못 젤리를 먹어서 상쾌함을 느끼면 된다고 했다. 가장 맛있었던 건 베르가못 젤리였는데, 바깥쪽은 살짝 단단한 젤리이지만 터트렸을 때 안쪽에서 새콤달콤한 즙이 나와서 굉장히 상쾌했다. 크레페는 엄청나게 신경을 써서 들여온다는 어디어디 농장의 무슨무슨 품종의 딸기가 근래 먹었던 딸기 중에서 가장 맛있다고 할 만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냥 평범하게 맛있는 정도였다. 디저트와 커피를 합해서 1700엔이었는데, 가성비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듯하다. 하지만 방금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역시나 누군가가 찍어둔 사진이 올라와 있는데, 다시 보니 어쩐지 상당히 맛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아무튼 영수증도 받지 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황급히 달려갔으나 12시 53분에 와야 할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아서 십 분 정도 조그마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방금 먹은 디저트의 그림이나 그리며 기다리다가, 1시 3분에야 도착한 버스를 타고 긴카쿠지로 향했다.

32번 버스는 긴카쿠지미치銀閣寺道가 아니라 긴카쿠지마에銀閣寺前 정류장에서 세워주기 때문에 조금 덜 걸어도 된다. 버스를 내렸을 때에는 오전부터 관광을 시작한 사람들로 이미 굉장히 복잡한 상태였다. 오래간만에 긴카쿠지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어가는 길.
앞뜰.
소중하게 가꿔놓은 이끼.
위에서 내려다본 긴카쿠지와 교토 시내.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한 시간 정도 정원을 산책한 것 같은데,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로 산책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정원 전체가 무척 아름다운 데다 날씨가 좋고 햇살이 따뜻하고 가끔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니,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교토의 소위 관광지를 찾아갔을 때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긴카쿠지를 둘러본 뒤에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더니 긴카쿠지로 올라오는 길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분명 버스는 밀릴 터이며, 나는 세상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슴이 설레니, 아니 걷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나는 철학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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