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한데 재수 없지가 않은 알짜배기 인류학 역사 강의
BOOK REVIEW
'인간의 흑역사'
이게 최선입니까, 인간?
책의 프롤로그를 읽기도 전에, 앞표지 바로 뒤에 적혀있는 문장이다. 이 책은 뭔데 인간을 대상으로 시작부터 비아냥대는 것일까. 그런데 신기하게 책을 읽다 보면 나도 이 질문을 똑같이 하고 있다. 이게 최선인 건가, 인간. 아뿔싸, 그런데 내가 인간이다. 묘하다. 거시적인 관점의 인류사적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나라는 개인 (한 명의 인간)의 삶도 돌아보게 한다.
간단하게 이 책은 역사 속 다양한 사실과 실제 연구를 토대로 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얼마나 많은 '바보짓'을 해왔고, 또 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일을 말아먹는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풍성하고 깊이 있는 지식과 증명된 사실을 토대로 인류의 바보짓을 정말 디테일하게, 아주 디테일하게! 소개하고 설명한다. 그것도 신랄하고 유머러스하게!
인간의 바보짓에 대해 말해주는 책의 저자는 톰 필립스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인류학과 사학, 과학철학을 전공한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저자 소개란에 있는 그의 이력에 걸맞게 책은 겉핥기식이 아닌 제대로 된 지식과 사실들로 꽉꽉 차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책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담겨있느냐보다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책의 모든 내용은 일명 '인간의 흑역사'(a.k.a 바보짓)를 향하고 있다.
'인간의 흑역사'란 주제로 거진 300페이지의 (그것도 작은 사이즈가 아닌) 책을 채우는 지식과 사실들이라니. 그런데 재밌다. 너무 재밌다. 솔직히 술술 휘리릭 읽히는 책은 아니다. 책 뒷 표지에는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써 내려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역사 강의"라는 소개 문구가 있다. 그렇다, 이 책은 '역사강의'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강의라는 게 포인트.
지식을 전달하는 책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게 대학교 전공서적 아닌가. 나는 이런 류의 책들을 주기적으로 가끔 접한다. 공통점은 다 읽으면 뿌듯하고, 읽으면서 "오오.! 오오오...!"란 감탄사를 연신 내적으로 내뱉으며 새로운 지식에 놀라고 감탄할 때가 많았지만, 읽을 때마다 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흥미'롭지만 '재미'있는 책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흥미'로우면서 '재미'까지 있다! 이 책의 재미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책의 처음부터 (심지어 제목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저자의 시니컬한 태도다. 맨 위에 적은 질문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태도로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설명해준다. 그런데 재수 없지가 않다. 인간의 오점과 바보짓을 역사 속에서 찾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찾아 보여주는데도 묘하게 다정하다 해야하나. 그도 그럴 것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독자 여러분도 최근에 한 번쯤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신조를 막론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원 참, 세상이 어쩌다 이 꼴이 됐지?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좁쌀만큼이라도 위안이 되고자,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걱정 마시라, 인간 세상은 항상 그 꼴이었다. 그리고 우린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마지막 문장에 나는 밑줄을 쫙 긁고 옆에다 'ㅋㅋㅋ'라고 적어놓았다. 기본적으로 시니컬하긴 한데, 이 사람은 인간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인간의 흑역사와 오점들을 말하면서도 "그래서 인간들 우리는 다 그지 같아! 별로야! 최악!"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나 바보 같은 우리를 성찰하며 더 나아지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글에서 느껴지는 시니컬한 겉모습 이면에 기본적으로 모나지 않고 바르고 다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하긴 진짜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책의 들어가는 말에 이런 글을 적겠나. (물론 이 글 자체도 농담이 섞인 중의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는 인간의 다양한 바보짓을 총 10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소개한다. 사실 그중 내 뇌리에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건 첫 번째 장인 "우리 뇌는 바보"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의 뇌의 성향에 따른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바보짓'에 대해 설명한다.
뭔가를 결정할 때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기준점 휴리스틱'과, 모든 정보를 객관적으로 신중히 따지는 것이 아닌 가장 극적이고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심리를 가리키는 '가용성 휴리스틱', 일단 선택하고 나면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 심리현상인 '선택 지지 편향'등을 소개하며, 우리의 뇌가 얼마나 '일상적으로' 많은 오류를 내포한 판단을 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을 실제로 있지도 않은 패턴에 따라 이리저리 가르고, 제일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즉각적 판단을 내리고, 원래 갖고 있던 생각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별적으로 취하고,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별 이유 없이 우리가 잘났다고 확신하니 편견이 꽃필 수밖에 없다."
어디 먼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인지 오류다. 학술용어로 간단하게 개념화한 단어들로 적어놔서 그렇지, '선택 지지 편향'만 해도 내가 매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쇼핑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옷을 샀다 하자. 그런데 그 옷이 정말 이쁘면 다행인데, 애매~해도 내 쇼핑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를 열심히 찾는다.
예를 들어 "그래도 이 정도면 가성비는 좋지. 혹은 어차피 거기서 거긴데 이 정도면 무난하지" 등의 생각들이 그러하다. 누군가 내가 산 애매한 옷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해도 싫다. 내 선택을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선택한 순간 그 선택이 옳다고 믿고 싶어 한다. 선택에 대한 결론을 객관적으로 내는 것이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오류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매일매일 착실하게 (사고의 편의를 위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다. 사실 알고 있었는데 콕 집어서 설명해주니 빼도 박도 못하는 느낌.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오류들이 얼마나 '일상적'인지에 집중하고 싶다. 오류가 없는 완벽한 사고를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오류를 범하는 사고가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우리의 개인적-범인류적 바보짓이 얼마나 예견된 결과였는지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소소하게는 '이불 킥', 크게는 인간과 지구의 파멸까지로 이끌 이 바보짓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거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바보짓이 아닐까. 게다가 이렇게 일목요연하고 재미있고 흥미롭고 디테일하게 바보짓을 설명한 책까지 있는데!
편견과 오류가 당연한 것이라도 우리는 편견 없고 오류 없는 사고를 향해 노력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 '옳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의 표지에도 나와있으며 대부분이 알고 있는 문장이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글귀가 유명해진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하지만 이제는 공감을 넘어 그럼 어떻게 바보짓을 안 할지 고민할 때 아닐까. 적어도 우리가 했던 바보짓만은 다시 안 하도록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며 무지의 지를 이야기했던 소크라테스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좀 더 나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선 적어도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뭘 모르는지도 알면 좋겠지만, "모르는 데" 뭘 모르는 걸 알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쉬운(?) 방법 한 가지는 적어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이것조차, 이 책에서 아주 친절하고 상세하게 보여주는 역사 속 우리 인간들은 몰랐다. 본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 모른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렇기에 저자가 이 책을 지은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우리가 착실하게 쌓아온 바보짓의 산물인 흑역사들을 찬찬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의 흑역사 돌아보기'는 인간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writer 심록원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책을 직접 읽고 적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