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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인생 권태기

35살 맞닥뜨린 인생 노잼시기(Feat. 나솔 안녕...)

by 미니밈

일, 집, 육아. 쉴 틈 없이 반복하는 내 삶의 유일한 낙은 매주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보는 거였다. '나는 SOLO', '금쪽같은 내 새끼'처럼 일반인이 나오는 리얼리티 관찰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지금껏 한 회도 놓치지 않고 챙겨보았다.


그런데 '나는 SOLO' 27기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동안 봐왔던 TV 프로그램들을 안 보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솔로 애청자로서 지금도 믿기 힘들다. 나에게 마약과 다름없던 프로를 갑자기 뚝 끊다니... 생각해 보면 그 시발점은 바로 나는 솔로 27기에서 남자 출연자들이 단체로 방에 누워있던 장면을 보고 나서였다.



아... 이번 기수는 재미없으려나?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위 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같이 전의상실한 느낌이랄까. 혹여 재미가 있다 해도 이젠 다른 사람 관찰 프로그램을 보는 데에 현타가 왔다. 1시간 시청 끝나고 나면 현생인데, 그 수많은 시간 동안 TV를 봐왔지만 뭐 하나 내 인생이 바뀐 건 없으니까.


처음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 무슨 직업을 갖고 살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지? 남녀가 서로 소통을 어떻게 하지? 저런 장면은 엄청 설레는구나! 저 집은 아이를 어떤 태도로 키우지? 아이를 어떻게 바르게 키워야 하지? 나도 모르게 안 좋은 말과 행동들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등등 이런 단순한 호기심에 리얼리티 관찰 프로그램을 좋아했는데... 실제로 동화처럼 아름답게 끝나는 사랑이야기는 잘 없고, 결국 한 회차마다 비슷한 플롯으로 끝나고, 빌런 찾기, 자극적인 장면들만 편집되어 보이는 것 같아 피로감을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보았다.

몇 년 동안 내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그렇게 단조로웠던 일상이 더 단조로워졌다.

24시간 중 빈틈을 TV시청으로 채워나갔는데, 이젠 더 이상 킬링타임 할 수 없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도파민이 싹 사라지자 권태가 찾아왔다.






그동안 무언가가 되려고만 했었다.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진짜 하고 싶은가?'에 대한 물음에 매번 답할 수 없었다. 변화를 이끌고 나갈 동력이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결혼을 했고 아기를 키우고, 삶이 아닌 생활이 그저 반복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나를 위해 갖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 그저 5일 돌려가며 입을 출근룩이면 됐고, 신발은 편한 운동화면 족했다. 퇴근하면 집안일과 육아를 해야 하니 취미에 쏟을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고, 더는 20대 때의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WANT가 사라진 삶에는 MUST만 가득했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직장 가고, 집안일하고, 육아하고.

매일매일. 계속계속.


가족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진 않아도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여행 가고 싶으면 가지만, 항상 불안에 시달렸다. 어서 돈을 더 벌어야 하는데, 좀 더 멋진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즉시 이루어질 수 없고, 진짜 목표는 뭔지 모르겠고, 그 와중에 가족들을 위한 생활은 매일매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굴러가야 했다.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 진짜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드라마와 예능보기, 책 보기 이런 것들은 킬링타임만 되었지, 본질적으로 나를 한층 더 성장시키고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나. 내 하루에 진짜 활력과 생기를 줄 수 있는 일인가. 주체적으로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고 시간만 소비하다 끝나는 일은 과연 의미가 있나.


그 의문이 든 순간, 모든 의욕과 욕망이 사라졌다. 좋아하던 TV프로도 안 보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싫고, 책을 보는 것도 싫었다. 다 의미 없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만이 그 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돈을 버는 건 어쨌든 사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고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가장 우선되는 기준이니까. 그것만이 삶의 목표였다.






돈 벌기만이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는 순간, 모든 것들은 다 의미 없는 걸로 치부되었다. 모순적이게도 돈 벌기도 즉각적으로 수백만 원, 수천만 원 벌 수 있는 게 아니니 돈 버는 부업에 몰입도 잘 안 됐다. 어떤 일을 하든 예상 가고 지겹고 권태로움만 남았다. 오히려 돈 버는 일 말고 지금의 삶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누워있지만 말고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필요했다. 그걸 찾아 나서려면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미루기만 했던 걸 하나씩 해나가야 했다.


유튜브로 '인생 권태기'를 검색해 보았다. 삶에 목표가 없어서 지루함을 느껴서 생긴다고 한다. 김창옥 강사님은 인생에 3단계가 반복되는데 '1. 열정기, 2. 권태기, 3. 성숙기'라고 하셨다. 열정기도 권태기도 영원하지 않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삶에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고 그것이 반복되며 인간이 성숙해나간다고 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유튜브 영상은 '드로우앤드류'님의 영상이었다.


인생이 노잼인 이유는 뭘 하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고, 알아도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서다. 하고 싶은 걸 모르는 이유는 매번 주어진 삶에 익숙해져서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 찾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뭔가 계속 성취해 나가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해 간다.

인생 노잼시기를 벗어나려면, 첫째 인생을 영화처럼 생각하자. 드라마, 영화 주인공의 자아를 나에게 끌어와서 내 삶에 적용해 보자. 하다못해 배경음악을 들어도 그 무드가 바뀌기 때문에 좋고, 공간을 비슷하게 꾸며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내 삶을 살아간다는 마인드셋을 가지면 도움이 된다.

두 번째, 인생을 게임처럼 생각하기. 게임은 레벨 업 하기 위해서 지루한 일들을 해내야 한다. 게임은 보상체계가 확실하고 퀘스트가 있어서,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들도 참아낸다. 하지만 인생은 즉각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퀘스트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쉬운 퀘스트부터 주자.

세 번째,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자. 내 주변에 작은 것들을 소중히 하고 바라보고,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지 말고 직접 만들어 보자. 인생 노잼 시기에 가장 하면 안 되는 게 남의 인생을 가십거리 삼지 말기.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거다.


생각을 관통하는 말씀을 해주셔서 무척 도움이 되고 인상 깊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TV나 책 보기도 그 주인공이 멋진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마인드를 내 걸로 빌려와 어쩌면 주체적으로 살아가 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마냥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나도 내향적이기만 한 성격이었는데, 발랄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나 만화를 보고 나면 조금씩 밝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었다.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 어떤 일이라도.

인스타툰 만들기, 페인팅해보기, 봉사활동하기, 운동하기 등등.

브런치 글쓰기도 그중 하나이다.


브런치에 그동안 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소재고갈, 귀찮음의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매번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썼는데 그게 문제였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유익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잡다한 생각과 번민을 뱉어내기 위하여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써 담았다. 그렇게 '배설'한 글들에는 힘들었던 감정과 고뇌가 가득 담겨 있었고, 마치 길에서 더러운 쓰레기를 보듯 묘하게 부정적인 감정들만 느껴졌다. 글들이 쌓여갈수록 부정적인 감정 해소를 위한 글이 대부분이었고 내 치부가 드러나있는 것 같았다. 또한 아무리 글을 뱉어내도 유튜브 조회수 수익처럼 즉시 수익화하지 못하는 현실에 한계를 느끼며 잠시 브런치에 손을 떼게 되었다. 블로그도 기웃거렸지만 뭐든지 끝까지 해보지는 못했다. 일상적이고 담백하게 써가는 블로그 글은 정보 공유성 글들을 써야 하지만 내 깊은 심연의 느낌과 생각들을 드러내기에 너무 공적인 공간이었다.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뭐 대단한 작가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쓰고 싶을 때 쓰자.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내 글이 된다. 깜깜하고 어둡기만 한 글들도 하얀 배경화면에서는 빛을 받아 그 기운이 정화된다. 글자 하나하나에 숨 막혔던 마음들을 다 토해내고 나면 비로소 텅 빈 마음속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깜깜한 터널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눈부시게 환한 빛이 비치고 있듯이, 지금 이 상념과 고민하는 순간들도 치열하게 기록하고 어느 날 뒤돌아본다면 그저 그땐 그랬지 하고 웃으며 볼 수 있지 않을까. 부정적인 감정들을 글로 토해내기 싫어서 그 마음들을 숨기고 감추고 가슴에 담다 보면 오히려 병이 나지 않을까. 누구를 위하여 밝은 글만 써야 하는 걸까. 마치 인스타그램에 행복하게 활짝 웃는 사진들만 올리는 것처럼 이 공간에서까지 그런 보여주기식 글들만 쓸 수는 없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모든 순간이 완벽할 순 없다.

그냥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고 기록해 나간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이 생을 후회 없이 잘 살아왔는지 판단할 수 있다.

지금은 그저 묵묵히 터널 속을 걸어 나가자.

죽기 전까진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자.


다른 사람의 삶을 TV로 지켜보기만 하는 하루보다는

내 삶 속에서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찾아 이뤄나가는 하루를 보내자.


그래서 내가 처음 시작한 일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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