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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Apr 15. 2016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음악 에세이 22 - 말줄임표를 수반하는 음악


<브람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5 1 >    



죄목은 고독형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에 처합니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변호사 시몽은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에게 이렇게 선고한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로 고소합니다.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 그리고 체념으로 살아온 죄를 죽음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이것이 폴의 죄목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폴에게 연주회에 초대한 시몽.

물음표는 폴에게 말줄임표로 바뀐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연주회에서 브람스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점차 음악을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쉬워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를 잊어버리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폴은 시몽에게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프랑스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한 대목이다.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자신을 방치한 폴은 끝내 자기 자신을 상실했다.


사실 그녀의 가장 큰 죄는 진실을 외면한 죄이다.


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에게 진실하지도 신실하지도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에 눈을 감은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이제 그녀에게 삶의 모든 것은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음악소리는 안 들리고 책은 안 읽힌다.

삶은 그녀에게 흔적을 안 남기고 그저 스쳐 지나간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오지만 오히려 사랑의 허망함만을 느낀다.

헌신적인 사랑도 언젠가는 끝날 것을 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잡을 수 없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집착한다. 그편이 책임을 전가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나의 불행은 불성실한 연인 탓이라고.


그렇지만 그녀는 실상 자신에게,

자신의 삶에 불성실한 것이다.

   

폴이 받은 ‘고독형’은 자기 자신과의 단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가 아니라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호한 진술     


브람스하면 속 깊은 남자, 아니 속 모를 남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 피아니스트의 인터뷰 내용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 브람스가 혼연일체가 안 되는 사람이자 몸, 머리,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음악가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가 지적한 괴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람스는 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실의 외면도 은폐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실을 추구했다.

억제하고 깊숙이 묻어둔 생각과 감정들을 붙들고 그는 끝까지 씨름했다.

열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절제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름답고 진실한 사람은 즐거움 속에서도 침착하게, 고통과 근심 속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열정은 곧 사라져야 합니다.”    

   

스무 살 무렵에 패기만만하게 프랑스 문단에 등장한 프랑스아즈 사강은 자유분방한 삶으로도 유명했다.

수많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점철된 삶을 보낸 그녀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마약류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 때 사강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슷한 나이에 음악계에 떠들썩하게 이름을 알린 브람스는 섣불리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오직 작품 안으로만 응축시켰다.


그의 삶은 검소하고 단순했다.


브람스는 “누군가의 열정이 중용을 넘어버린다면,

그는 환자 같이 평생 약을 복용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고독의 길을 택했다.

타인에 의해 고독형을 선고받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이다.


곧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던 열정은 실은 그의 내면에서 끝없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나 도피처로서의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고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진실하게 직시했던 그는 음악으로 감정의 파도를 탔다.

그의 음악은 겉은 투박한 듯 하지만 그 안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있다. 

그 불일치에서 오는 괴리가 많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팎이 다른 그의 음악은

          늘 말줄임표를 수반한다.           



변신은 무죄


외향보다 내실을 중요시한 브람스는 화려한 기교파 음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작곡가로 꼽힌다. 그랬던 그가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연주효과가 화려한 변주곡을 작곡했다. 이미 리스트가 같은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때였다.


파가니니는 낭만파 비르투오소 시대를 연 선구자적인 작곡가이며, 리스트는 비르투오소 시대의 전성기의 작곡가였다. 화려하고 대담한 삶으로도 이름을 날린 이들은 동시대와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영감을 주었다.


브람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람스는 그들로부터 기교만을 위한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브람스는 1862년에 리스트의 제자이자 열렬한 추종자였던 타우치히를 만나 그로부터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화려한 변주곡을 쓸 것을 제안 받았다. 그는 이듬해까지 총28개의 변주를 각 14곡씩 묶어 2권으로 나눈 변주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브람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고난도의 기교와 화려한 표현이 두드러진다.


변주곡은 브람스가 가장 선호한 음악 형식이었는데,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원숙한 작곡기법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하나의 주제가 다양한 대가적인 기교를 통해 다채롭게 변모하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어쩌면 우리는 28개의 길로 우회하는 브람스의 한 길 속마을 흥미롭게 지켜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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