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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Apr 29. 2016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블랑제>

음악 에세이 23 - 자신만의 음악, 자신만의 길 ㅣ 음악가에 관한 책

“스승이 준비되면 제자가 나타나고,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라는 말이 있다.


남다른 이상과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스승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는 준비된 스승과 준비된 제자의 결정적인 만남에 대한 책이다.


예술과 인간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가진 스승은 음악과 삶에 대한 많은 영감을 준다. 한 사람과의 만남은 한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가 속한 세계가 클수록 우리의 지경 역시 더불어 넓어진다.   


결정적인 만남을 만드는 준비는 바로 치열함과 절박함이다. 누군가를 해답으로 만나려면 내 안에 질문과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이 책에는 나디아 블랑제의 폴란드인 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반대로 스물한 살이 되도록 피아노를 한 번도 만져본 적도 없는 그 제자는 어느 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음악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길로 그는 바르샤바 음악원의 시코르스키 원장을 찾아가서 레슨을 받았지만 유명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음악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 그 길을 단념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섯 달 동안 독학으로 연습한 뒤에 다시 시코르스키 원장에게 편지한다.


“원장님, 제가 무례하게 이런 편지를 드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은 이제부터 원장님이 내리실 결정과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 조금 발전한 것 같습니다. 십 분만 시간을 내서 제 연주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시코르스키 원장은 그를 불러 연주를 듣고는 그의 놀라운 발전에 큰 감동을 받아 그를 제자로 다. 10년 뒤에 그 제자는 유명한 협주곡을 비롯한 많은 레파토리를 연주  피아니스트이자 바르샤바 음악원의 교수가 됐다. 나디아 불랑제는 그에 대해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방법을 찾아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스승과 제자의 줄탁동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디아 불랑제는 런던 로얄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 보스턴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지휘자이자 작곡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던 진정한 음악가였다.


그녀가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크게 기여를 한 것은 교육자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녀의 손을 거쳐간 음악가들은 아론 코플랜드, 필립 글래스, 아스트로 피아졸라, 다리우스 미요, 프랑시스 풀랑크 등의 작곡가들을 비롯해 다니엘 바렌보임, 존 엘리엇 가드너, 예후디 메뉴인, 머리 페라이어 등의 연주자들 등 수 백 명에 이른다.


스타일과 개성이 각각 다른 이들에게 불랑제는 그녀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승으로서 그녀가 지킨 원칙은 그들이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격려한 것이다.

   

그렇지만 가르침 자체가 느슨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엄격한 편이었다.


그녀는 음악을 공부하려면 법칙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음악을 창조하려면 그 법칙을 모두 잊어야 한다고 믿었다. 진정한 자유의 전제 조건은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이해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스승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경계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음악적인, 인간적인 위대함의 이유이다.  

   

불랑제는 이렇게 말한다.


“확립된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 확립된 언어 속에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해요.


또 자기 자신이어야만 하고요.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게 이미 대단한 것이거든요.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제자가 여러 도구들을 자유자재로 만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거예요.


제자가 그 도구로 무엇을 하건, 선생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제자에게 발명의 힘을 줄 수도 없고, 또 제자가 지닌 발명 능력을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에게 읽고, 듣고, 보고, 이해할 자유를 줄 수 있을 뿐이죠.”

   

이 책은 불랑제의 나이 86세부터 91세까지 브뤼노 몽생종과 한 5년간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구성됐다. 길고 깊은 대화 속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음악과 교육에 헌신한 그녀의 일생이 비춰진다.


실력과 인격을 갖춘 불랑제의 모습은 최근에 경험한 한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국내의 젊은 피아니스트였다. 클래식계에서는 드물게 어려서부터 팬클럽을 이끌 정도의 인기를 지닌 연주자였다.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이른 나이에 교수활동을 병행하는 그에게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에게서 “가르치고 싶은 실력을 갖춘 학생이 없기 때문에 교육에는 별 흥미가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음악이라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의 귀로 듣고 자신의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슨은 거울이랑 똑같습니다. 우리가 거울로 자기 자신을 보듯 거울을 보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못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학생이 레슨을 통해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선생의 역할이 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큰 의미가 없겠죠.”


가르침에 대한 그의 이 말은 어쩌면 불랑제의 말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서 스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고백한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성공한 연주자였는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스승이 될 만한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는지 의문이 남았다.

   

몽생종과 인터뷰를 하는 당시에 블랑제에게 누군가 미국 제자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마 600여명이 될 거라고 추정하면서 탁월하거나 평범한 제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렇게 반문했다.


“가장 뛰어난 제자들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낙담하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기본적인 조건 몇 가지는 충족시켜야 하고, 그 다음엔 각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할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바라는 한도 내에서 자기 활동을 해나가야죠.”  





그녀는 음악과 스승이라는 거울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으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내 안의 나를 깨울 결정적인 만남은 준비된 이에게 허락된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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