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꿈꾸는 이들을 위한 낭만적 세계
최초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기억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다. 엄마는 배경음악처럼 반복해서 틀어두셨다. 느린 아다지오 2악장이 유독 나를 사로잡았다. 한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있는 나이였지만 집안에 흐르는 음악이 내가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커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의 3악장이 나를 잡아끌었다. 미묘하게 변주되며 반복되는 선율은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로 하염없이 이끄는 것 같았다. 이 악장의 두 주제는 박자의 경계를 흐리는 반복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리며 불가해한 흐름을 만들고 경계를 넘어 끝없는 세계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
베토벤은 고전과 낭만의 경계를 잇는 작곡가로 평가된다. 음악에서 낭만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선두에 베토벤의 작품이 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E.T.A. 호프만은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대한 비평문’(1810)에서 낭만적 작곡가 베토벤의 기악음악이 우리에게 놀라운 미지의 영역을 드러내고 낭만주의의 본질인 무한한 갈망을 일깨운다고 썼다. ‘낭만적’이라는 단어는 중세의 소설 로망스에서 유래된 말로 영웅적·전설적 인물이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이상향과 연관된다.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며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를 추구한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음악은 보다 극적이고 개성적 방식으로 인간 영혼의 깊이와 자연의 숭고함, 초월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고자 했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세상에 대한 갈망과 기존의 법칙과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는 낭만주의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이 땅의 끝에서
낭만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7)이다. 파도처럼 혹은 구름처럼 보이는 안개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방랑자는 발을 간신히 디딜 수 있는 높고도 험악한 바위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뒷모습은 불안하게도 의연하게도 보인다. 신비하게 휘도는 안개는 자연일 수도 있지만 그의 내면 풍경일 수도 있다. 무한한 자연과 복합적 자아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프리드리히는 “모든 진정한 예술은 신성한 순간에 잉태되며 은총의 시간에 구현된다. 종종 예술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내면의 충동이 창조로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프리드리히의 또 다른 그림 <바닷가의 월출>(1822)은 자연과 교감하는 또 다른 낭만적 장면을 포착한다. 고요하고도 다층적이다. 두 여성과 한 남성은 해안가 완만한 바위 위에 있다. 저 멀리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있다. 달빛은 밝지만 모든 것을 드러낼 만큼은 아니다. 어둠에 싸여 거의 실루엣처럼 보이는 뒷모습의 세 사람은 달을 바라보는가, 생각에 잠겨있는가. 이들은 고독하게도 친근하게도 보인다. 이 불확실하고도 환상적인 풍경 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달무리 속 이야기가 이어진다. 명상과 성찰의 공간을 제공하는 풍경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보도록 시선을 확장시킨다.
꿈이 드리우는 시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낭만주의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낭만 가곡 시대를 연 슈베르트는 <밤과 꿈>(1823)에서 콜린의 시에 붙여 밤의 정경을 음악으로 그려냈다. 그에게 밤은 잠이 드는 일상적 시간 이상이다. 밤은 꿈이 깨어나는 장소다. “성스러운 밤은 깊어가고 꿈이 파도처럼 출렁이네, 달빛이 방을 비추듯 사람들의 고요한 마음에 꿈이 파고드네. 꿈은 기쁨으로 마음에 귀 기울이네. 날이 밝아오면 그들은 외치네. 성스러운 밤이여, 아름다운 꿈이여, 돌아오라!” 나지막한 피아노는 부드럽게 넘실거리며 으늑하게 색채를 바꾸고 멀리서 울리듯 몽환적 노래가 들려온다. B장조를 배경으로 하는 노래는 중간에 G장조로 내려가며 더욱 깊고 내밀한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밝은 낮은 신비의 빛이 사라지는 시간. 이들은 꿈에 잠기는 신성한 밤이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한다.
“지상의 다채로운 꿈속 모든 소리 중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린다. 은밀히 귀 기울이는 이에게.”
이 구절은 슈만의 <환상곡 Op.17>(1836)의 모토로 쓰인 독일 낭만파 문학을 이끈 슐레겔의 시구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문학적 요소를 작품에 적극 활용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슈만과 연인 클라라는 오랜 시간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슈만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은밀해지고 열렬해졌다. 소나타 형식이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쓰인 세 악장에는 폭발적 정열부터 애타는 탄식까지 절절히 새겨있다. 절규하듯 격하게 쏟아내는 1악장의 끝에 아다지오 코다가 나오는데 여기에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98>(1816) 중 6곡 ‘이 노래를 받아주오’의 선율이 쓰였다. 이 선율은 한편으로는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1817) 중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끄네”의 선율과도 유사하다. 시종 투쟁적으로 진격하는 2악장을 지나 느리고 은근한 3악장은 사무치는 그리움과 슬픔을 노래한다. 애절하게 도약한 후 속절없이 떨어지는 연결구의 선율은 베토벤 ‘황제’ 협주곡의 아다지오 2악장의 주제 선율을 연상시킨다. 수많은 암시와 의미가 중첩돼 있는 이 곡은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낭만주의의 화신 슈만
슈만은 독특한 내면세계를 가졌다. 더 완벽한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진부하고 틀에 박힌 것에서 벗어나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그는 낭만주의의 화신으로도 불린다. 슈만은 그의 음악과 글에서 상반된 성격을 가진 자아, 즉 정열적이고 충동적인 혁명가 플로레스탄과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몽상가 오이제비우스를 드러냈다. 고결하고 무한한 환상의 세계와 세속적이고 유한한 일상의 간극은 그에게 갈등과 고뇌의 원인이자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이중적 자아에 자신을 투영하는 한편 고루하고 견고한 기존의 음악세계를 타파하기 위해 슈베르트, 쇼팽을 비롯한 진보적 음악가들로 이루어진 ‘다윗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동맹은 그의 양면적 성격의 두 자아처럼 가상의 단체였다. 환상은 슈만이 현실과 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신비롭고도 고결한 세계로 이끄는 비밀스러운 관문이었다.
이상향의 메아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고유한 논리와 독자적 방식으로 오갔던 슈만은 9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피아노 곡 <숲의 정경>(1849)에서 자연과 환상, 일상과 신비가 공존하는 세계를 담아냈다. 작품은 사로잡히듯 써 내려가 일주일 만에 완성했다. 미지의 것들을 품고 있는 숲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영혼을 위한 심오한 탐색의 장이기도 했다. 사냥꾼(2곡)과 안락한 숙소(6곡)가 등장하는 숲에는 또한 고독한 꽃(3곡)과 예언하는 새(7곡)가 존재한다. 본래 총 8곡으로 구상했으나 ‘예언하는 새’를 마지막에 첨가해 숲에 신묘한 울림이 더해졌다. 숲의 공기를 극히 섬세하고도 절묘하게 흔드는 새는 미래의 시간을 노래하는 초자연적 존재다. 곡은 못갖춘마디로 시작해 시간의 경계를 흐리고, 불협화적 화음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든다. 종교적 색채를 입힌 코랄풍 간주 끝에는 동떨어진 조성으로 전조하며 비현실적 느낌을 강화한다. 이 곡은 어떤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하듯 끝나며 헤어 나오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미래의 전령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노래하는 이 ‘예언하는 새’는 미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낭만주의 음악은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이고도 초월적으로 저 너머 더 나은 세상으로 연결하는 접점이 된다. 가장 가깝고도 먼 곳이 순식간에 맞물리는 경험으로 이끈다. 유한한 현실에 영원한 세계를 불러오며 우리의 감정과 사고의 지평을 무한히 열어준다. 어쩌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더 아름답고 완전하고 충만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주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가 낭만주의 음악에 끝없이 매혹되는 이유일 것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웹진 (畵/音.zine) 2024년 가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