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그녀 사이 악연은 언제부터인지, 머리카락이라도 들키는 날엔 한여름 뙤약볕처럼 헉헉 숨이 멎는다.
남편은 왜 그녀에게 진저리를 치는 것일까. 두 사람 사이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들꽃 향이 온몸을 감싸는, 은은하고 촉촉한 그녀에게 한 번쯤 빠질 만 한데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녀를 소개하던 날, 여느 때와 다른 남편 눈빛에 마음을 내려놓은 게 잘못이었다. 단순한 사람이라 본심을 꿍쳐두었을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다. 그녀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 봐’라고 속으로 얼마나 벼르고 있었을까.
그래도 이렇게 보내면 안 되었다. 두 번 다시 걸음도 하지 말라니. 그녀가 있는 일주일도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조심조심,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살았는데. 얼굴 한 번 내비친 게 이토록 용서받지 못할 일인지.
나 역시 그녀가 잘난 척 하거나, 독한 성질을 지녔다면 만날 생각도 없었다. 여리고 순한 그녀라 시간이 흐르면 남편도 좋아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결국 순간적 방심에 그녀를 잃고 말았다.
가엾은 그녀를 내 손으로 보내고 돌아선 날,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을 째려보며 마지막 향기라도 남겨두었을까 그녀 머문 둘레를 맴돈다.
스물여섯 해를 함께 살아도 모를 일이다. 다른 일엔 둔할 정도로 무딘 남자가 왜 그녀에겐 이토록 박절하게 구는지. 그녀만 보면 무심한 후각세포들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대동단결이라도 한 듯 모여드는데 놀랍고 황당한 위세에 나도 그녀도 손 쓸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제풀에 꺾인 내가 그녀를 버리기까지 했을까.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깍지 낀 두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잔소리를 퍼붓는 이 남자. 매운 손으로 뒤돌아서는 남편 등을 향해 으악 소리 나도록 후려치고 싶지만 그녀도 사라진 마당에 무슨 소용일까. 어금니만 우지끈 악물뿐이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가운 맘과 함께 근심부터 일긴 했다. 그녀와 오래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녀라도 남편에게는 모든 그녀들이 그래왔듯 독기 품은, 성질 고약한 마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 이름은 플라워 디퓨저, 라일락과 프리지어 향이 잘 어우러진 싱그러운 폴로랄 부케이다. 향에 민감한 남편 때문에 선물받은 그녀를 꺼내지도 못한 채 숨겨만 둔 일주일. 피아노 위에 겨우 스틱 한두 개 꽂아 아쉬움 달래고 있는데 이틀 만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사뭇 다른 그녀라고 남편에게 온갖 아양 떨며 비위까지 맞추었건만 부질없는 일이 된 것이다.
고약한 것으로 따지면 나만큼 할 말이 많을까. 베란다 한 모퉁이에 수북이 쌓아 둔 마늘. 몸에 좋은 약은 다 싫다던 남편이 쉰 넘고 부터 그것에 꽂혀 생마늘은 물론 구운 마늘, 찐 마늘, 마늘장아찌까지. 올해만 해도 몇 접 째인지. 무더위에 창문을 닫을 수도 없고 장마철 눅눅한 냄새까지 겹쳐 아이들 원성이 이만저만 아니다.
얼마 전엔 남편이 마늘청을 만들어 보관하다 몽땅 상해 버린 적도 있다. 그것도 욕실 변기 안에 통째로 버려 여러 번 닦고 씻어내도 아직도 쾨쾨한 냄새가 난다. 그것만일까. 시간 날 때마다 애첩 같은 마늘과 붙어 있어 갈수록 말도 하기 싫고 가까이 가기도 싫은,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음식 만들 때야 마늘이 풍미를 더하지만 독한 냄새로 따지면 마늘만한 것이 또 있을까. 남편은 화학 약품을 첨가해 만든 향을 어떻게 마늘과 견주냐며 겉모양은 투박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자연산 향수라고 칭찬하기 바쁘다.
고약한 남편과 살다보니 짙은 화장은 고사하고, 향수 한 번 뿌린 적 없다. 조금만 진하게 화장하면 지끈지끈 머리 아프다고 야단법석,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딸에게도 향수는 금물이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한 번은 신발장과 욕실에 방향제를 놓아둔 일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일 향 나는 방향제라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밤사이 남편이 모두 치워버렸다. 향긋한 냄새보다 쾨쾨한 냄새가 낫다는 것인지, 자기 맘대로 버린 남편이 얄미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를 내 손으로 버린 것도 그런 이유이다. 왜 이른 아침부터 아들녀석 방문을 벌컥 열어 그녀를 보았는지. 남편이 그녀로 인해 머리가 욱신거려 깨질 것 같다고 잠도 덜 깬 내게 투덜거리는데 짜증이 확 치솟았다. 남편 보란 듯 벌떡 일어나 그녀를 안고 그대로 배수구로 직진했는데 그 바람에 선물도 그녀도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내가 그녀 대신 독기 품은, 성질 고약한 마녀가 되긴 했지만.
그녀가 가고 난 후, 그녀 빈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기라도 했듯 베란다 모퉁이에 숨 죽여 살던 마늘이 주말마다 반접씩, 한 접씩 거실로 발을 들이더니 급기야 집을 장악한다. 아침엔 욕실 안에서 온 몸을 불리고 있는 마늘이, 오후에는 거실 한복판에 너풀너풀한 날개옷을 입은 기세등등한 마늘이 떡하니 차지하는 모양새라니. 게다가 이 방 저 방 흩어져 앉은 독한 냄새까지. 집이 마늘 천지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리 코드도 착착 맞는지. 남편이 한 손으로 마늘을 안고 톡 건드리면 마늘은 알아서 옷을 벗고. 세상에 그런 궁합이 없다. 매번 첫눈에 반한 듯 넓은 함지박에 매끈하고 허연 마늘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눈에 콩깍지가 끼였는지 맵고 독한 성질도 그저 좋다며 그녀들에게 호기롭게 둘러싸인 남편, 저러니 해가 저물어가는 것도 모를 수밖에.
슬며시 거실로 나가니 여전히 함지박이다. 실컷 만나라고 자리까지 피해주었건만 지쳐가는 것일까. 첫눈에 반한 이유가 궁금해 틈 벌어진 사이를 슬쩍 비집고 들어서는데 매력은 둘째 치고 양 때문에 허우적대느라 헤어나지 못할 듯은 하다.
플로랄 부케 사라진 집에 마늘인지 자연산 향수인지 모를, 맵고 투박한 냄새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