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May 27. 2020

아버지의 쑥버무리

추억을 먹는 시간

 대로변 화단에서 할머니 한 분이 쑥을 캔다. 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삼각지 한 가운데에서 모든 매연을 들이마셨을 쑥을. ‘저걸 과연 먹어도 괜찮은 걸까’ 싶은 나의 의문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식탁에는 그날 쑥이 올라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캔 쑥을 단돈 천원이라도 받고 내다 파시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운 곳에 산이라도 있었더라면 혼잡한 도시 한 가운데서 나물을 캐지는 않았을 텐데, 노구를 끌고 오르기엔 산은 너무나 멀고 벅차다.


 쑥이 있는, 쑥을 캐는 할머니 덕에 도시와 화단은 완벽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대해에 떠있는 섬과도 같이. 추방된 자연이 그 좁은 화단 공간 안에 다 들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왠지 그 곳만 공기가 다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쑥을 캐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는 버스 좌석에 앉아서 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매연을 잔뜩 먹은 쑥일지라도 오늘 하루 할머니가 원하는 만큼의 쑥을 캘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렸을 때 봄이 되면 호미 하나, 바구니 하나를 들고 쑥을 캐러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봄은 모든 것을 내어놓는 계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봄이 온다는 사실은 삶의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나와 친구들은 대체로 가난했지만, 풍족했다. 시골에서 자란 덕에 산에만 가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자연이 삶 속에 있었고 자연 속에 삶이 있었다. 산딸기와 오디는 손과 입이 빨갛고 까맣게 물들 때까지 먹을 수 있었고 살구도 지나가다 먹고 싶으면 하나씩 따 먹었다. 남의 과수원에서 수박 하나를 깨서 친구들과 먹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인심이었다. 지금은 비싸서 사먹기도, 구경하기도 힘든 과일들이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옆에 있었다.

 

 쑥과 냉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주인이라면 산이었고 자연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가서 캐도 되는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우리에게 나물을 캐오라고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봄에는 당연히 산에 가는 것이 나와 친구들의 일이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많이 캐내겠다고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산에는 지천으로 쑥과 냉이가 깔려 있었다. 호미가 없는 친구는 나뭇가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바구니에 쑥과 냉이가 가득 차면 자연스레 하산했다. 어쩌면 도심 속에서 쑥을 캐던 할머니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쑥을 캐는 것이 일상이었으리라.


 그렇게 한 끼의 반찬을 스스로 장만했다는 건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었다. 나는 쑥과 냉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를 좋아하는 부모님을 위한 선물이자 보람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뱀이 나올까, 뭐라도 나오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서라도 산에 가서 나물을 캐는 건 생각조차 못할 텐데,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용감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노동일 것이 어린 나에게는 그저 놀이이자 재미였다.


 보통은 쑥은 국이 되고, 냉이는 무침이 된다. 특히 쑥국의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지 않아 쑥국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그 날은 웬일인지 아버지가 다른 메뉴를 준비했다. 특별한 레시피도 없이 밀가루 같은 것(맵쌀가루)과 쑥을 대충 버무려서 거기에 소금과 설탕을 조금 넣고 찜기에 찐 게 다였다. 그게 나중에야 쑥버무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음식에 이름이 따로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 했었다. 그냥 아버지가 만드는 정체모를 음식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성의 없는 조리 과정이라니,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음식은 늘 대충이었다. 여느 가정과 달리 우리 집은 엄마가 바깥일을 하고 아버지가 가정 살림을 했다. 그래서 찬이 별로 없었고,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살기 위해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쑥으로 그것도 투박하게 비비듯 만든 음식이라니 소멸할 기대감조차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의 그 맛이 생생하다. 화려한 데코도 없었고, 들어간 거라고는 멥쌀가루와 쑥이 전부였지만 쑥국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쑥버무리는 거친 데라고는 전혀 없이 보슬보슬했다. 웬일인지 쓰지 않고 달콤하면서도 향긋했다. 이상하게도 막힌 코가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버무리를 깔끔하게 다 먹어 치웠다.


 국이 아니라 버무리가 된 쑥은 싫었던 것에서 좋은 것으로, 맛이 없던 것에서 맛있는 것으로 둔갑했다. 그 전까지는 쑥을 캐는 행위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쑥 자체가 누군가를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나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하나의 재료가 무엇과 함께 하는지는 실로 중요한 일이었다. 마치 어떤 이가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모습 자체가 달리 보이는 것처럼. 그때부터 내게 봄은 쑥국의 계절이 아니라 쑥버무리의 계절이 되었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모든 음식이 그저 그랬는데, 지금은 그때의 맛이 그립다. 어쩌면 음식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든 아버지가 그리운 것이겠지. 그리고 시간은 기억을 늘 미화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실제로는 별로였던 음식들이 추억과 버무려져 머릿속에서 다른 음식을 만들어냈을 수도.     

 


 

 너그러운 봄이 오고 마트에는 어느새 쑥이 나왔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내가, 쓸쓸한 뒷모습의 할머니가 캔 것처럼 누군가의 조막만한 손이, 거칠고 주름진 손이 캐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쑥 두 팩을 사서 아이들에게 버무리를 해 준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 때문에 짜증을 내고 힘들던 마음이 평화롭고 애틋해진다. 엄마에게 혹시나 받았을지도 모를 상처들을 살살 달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요즘은 대추도 들어가고 갖가지 재료들이 들어가는 레시피들이 많지만, 다른 재료들이 섞이는 순간 쑥의 맛이 변질되는 것만 같아 오직 쑥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버무리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단호박과 말린 과일을 살짝 곁들인다. 어린 나처럼, 아이들은 쌉싸름한 쑥은 싫어하지만, 쑥버무리는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쑥버무리를 기억하듯이 아이들도 나중에 어른이 돼서 지금의 내 쑥버무리를 기억할 수도 있겠지.


 어린 나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의 아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쑥버무리를 먹는다. 우리는 그렇게 봄을 아꼈다.




작가의 이전글 중쇄를 찍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