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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Jul 06. 2021

나를 뒤흔든 세상의 문장들 7

세상의 슬픔에 공감하는 당신에게서 희망을 본다.

'무()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인데,

사는 동안 왜 그 수많은 유(有)의 과정을 위해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빠져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이 무()라서 어쩌면 다행이지만,

사는 동안은 수많은 유(有)의 과정을 탄생시키고 소멸시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왕 살아가는 이 있음(有)의 과정을

의미있고 재미있게 누리자는 생각을 하며

매일 일명 노동이라는 것을 하였다.


왜 오래 배운 학문을 써먹지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있는데도 굳이 그것을 택하느냐며

곁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지만,


그 학문이라는 게 막상 써먹어보니

내게는 사람을 살리는 것 아니오,

오히려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듯 했고,

어떻게 이롭게 한다는 건지

의미도 재미도 없었다.


누가 서로 잘났는지 잰체하며,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나있는 속내들을

겉으로 서로 위하는 척 포장하

안으로는 먹고 먹히는, 밟고 밟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에 지루하 지쳐있던 차,


내게는 내 몸으로 쌓아올리는 진실된 성벽이

훨씬 더 즐겁고 체질에 맞음을 알았기에

한치의 후회도 없었다.


노동.

내가 가진 몸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자본의 가치와 맞바꾸는 것.

물론 일하는 그 시간 동안은 나의 자유까지도

꽤 반납되지만,

그래도 노동자에게는 자유가 있다.

내가 일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만큼 선택하여 일할 자유.

그리고 일하지 않을 자유.


더 일하라고 권유하는 고용주에게 종속되지 않고

원하는 만큼만 일하며 하루하루

노동 너머의 시간들을 보낸다며 자부하는 날들이었는데,

지난밤에는 왜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바닥을 열심히 닦는 동료의 뒷모습을 보고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취약하고 무엇을 욕망하나.
...
사랑이 아니라면 기나긴 인생은 어떻게 살아지는 걸까,
한평생 한 사람의 곁이 되는 일은 사랑 없이 가능할까,
말과 살을 섞다가 살만 섞어도 혹은 말만 섞어도 사랑일까,
철학자와 식당 노동자가 동등한 직업인으로 존중받는 세상은 요원한 일일까.
한 줌의 권력자를 위해 다수가 노예처럼 일하는 슬픔 사태는 왜 지구를 뒤덮는가.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 <싸울수록 투명해진다>, 은유

고통이 고통을 알아본 것일까.

생을 열심히 사는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이 무지개의 끝임을 실감할 때,

사유하는 시간없이 한 사람의 존재로서가 아닌 기계적인 노동자로 있음을 실감할 때,

때론 갑자기 생각하는 범위가 너무도 넓어져서 문득 울컥하며 스스로 기쁨을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삶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도록
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곁에 남아있다. 무던한 사람, 철 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일을 마치고 가게문을 닫는 시간까지 퍼붓는 비 앞에서

하나뿐인 우산을 내게 쥐어주고 빗속으로 뛰어가는 내 동료의 뒷모습에 어찌 울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본이 자본을 불려나가고 인간은 이제 유희만을 즐기게 될지도 모르는 21세기 시대에

이 무슨 90년대 애잔함이란 말인가.

어쩌면 도저히 섞인 적도 없는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 내게 건네준 그의 짜디짠 마음을,

나는 반드시 세상의 슬픔에 대한 공감으로 갚으리라고

굳은 다짐을 하며

그 밤, 빗속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겐 '먹고사니즘'만큼 '자아니즘'과 '우리니즘'도 중요하니까.

내 나침반은 그리 향해 있으니까. 

게으름뱅이로서 나는 맹세한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특히 몇몇 기업 양아치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려 투쟁하기로.
가능한 한 스트레스가 나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내기로.
천천히 먹기로. 리얼 에일을 자주 마시기로.
더 많이 노래하기로. 더 많이 웃기로.
토하기 전에 정시 근무라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기로.
혼자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스스로 즐기기로.
일이란 단지 고지서에 찍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기로.
친구들이 힘의 원천임을 항상 기억하기로.
단순한 것을 즐기기로. 자연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로.
대기업과 회사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그 대신 좋은 것을 많이 만들기로.
순리를 벗어나기로.
아무리 사소한 수준이라도, 세계와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 데이비드 프레인, <일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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