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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Feb 08. 2020

기내식 이야기

하늘 위의 한끼줍쇼

올해 처음으로 여행이야기를 써보려는데 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서 도통 집중이...

그래서 머리를 환기하기 위해 올해 여행이야기는 가볍게 인류 공통, 궁극의 관심사 먹는 것으로 시작해본다.

음식+여행=기내식!

지금까지 먹었던 기내식들이다.


기내식은 맛이 없다.

그런데 뭐... 사실 그렇게 맛없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단체급식 수준 정도로 생각하면 적절한 맛이다.

다만 일반 식당에서처럼 주문해서 먹거나 정확한 단가를 알고 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개인의 취향과 전혀 다른 음식을 먹기 쉽고, 때론 비행기표 가격이 음식가격으로 여겨지기도 하다 보니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듯하다.

어쩌면 음식보다는 식량이란 표현이 걸맞을지도 모른다.

13시간의 장거리 비행에서 맛없는 한 끼조차 제공되지 않는다면 승객이 테러범이 될지도?

기내식 단가야 항공사들의 영업비밀이라지만(대체 왜....) 대략적 단가는 이코노미석 기준 1만~1만 5천원 정도, 퍼스트는 10만원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가항공의 경우 정확한 금액이 명시되어 있으니 더 알기 쉽다.


기내식이 맛없는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가장 유명한 이유는 기압이다.

KTX만 타도 귀가 멍멍 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아다닌다.

지상과 전혀 다른 압력은 미각에도 영향을 준다.

다시다, 미원 급의 조미료를 넣어도 미각이 기압에 눌려서 땅에서 방석을 깔고 철퍼덕 앉아 먹는 음식과 같은 짠맛, 단맛을 느낄 수 없다.

물론 하늘 위의 식사라는 사실 때문에 더 맛있게 먹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또한 기내식은 보통 음식보다 조금 더 인공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하늘 위엔 주방이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조리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기내식을 cold meal과 hot meal로 구분하는 것도 하늘 위에선 음식을 데우는 것부터가 비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레인지도 아닌 오븐(서양 주방에 있는 그런 오븐은 아니지만)으로 음식의 온도를 높여 제공하다 보니 유수분 조절이 잘 될 리 없다.

달라진 기압은 물의 끓는점도 변화시키는데 안전문제까지 더해지니 비행기에서 끓는 수준의 뜨거운 물은 없다.

사진에선 비즈니스석 라면이 사기그릇에 담겨 나오지만 사실 끓인 라면 보단 뽀글이에 가깝다.


자연적, 과학적 문제도 있지만 상황이 만든 특수한 문제도 있다.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안전, 테러 문제가 있으니 승객에게 번쩍이는 칼을 나눠 줄 수 없다.

식사도구로 제공하는 나이프는 예리함이 떨어지니 음식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음식의 식감마저 기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내에서 밥 먹는 일은 힘들다.

장거리 환승편에 타서 이코노미석 좁은 의자에서 다리를 두드리며 기내식과 간식을 번갈아 배식받으면 소, 돼지, 닭의 사육 환경에 관심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기내식이 맛이 없단 말을 조금 길게 써봤다.

관련업계에서 맛있는 기내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기내식의 특별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니 선처를 바란다.

p.s. 흔들리는 기내에서 오래된 폰카로 찍은 사진들의 화질에 대해서도 용서를...


# 터키항공

1 : 인천-이스탄불 / 2 : 이스탄불-말라가/3 : 이스탄불-인천

가장 최근에 먹은 기내식은 터키항공.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스페인, 포르투갈을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비빔밥은 한국 출발편이었는데 밤이라 조명을 다 꺼서 사진이 그지같... 밥이 질고 무엇보다 그릇이 양푼타입이 아닌 낮은 접시수준이라 제대로 비빌 수 없었다. 스페인에 처음 갈 때도 터키항공을 이용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마드리드 연결편과 리스본 연결편이 똑같은 리가토니라 혼자 재미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터키항공의 파스타 종류는 괜찮은 편이다.

1 : 이스탄불-마드리드 / 2 : 리스본-이스탄불

# 대한항공

1: 인천-양곤 / 2 : 양곤-인천

국적기인 대한항공의 기내식. 국적기지만 성인이 된 이후엔 거의 이용해 보지 못한 비싼 FSC... 기내식 경험도 적다. 비행기를 거의 안 타본 초등학교 때 자느라 기내식으로 나온 볶음밥 못 먹어서 잠깐 우울했던 기억은 있다. 직항이 대한항공뿐인 미얀마에 갈 때가 성인이 된 이후 이용한 거의 유일한 기억인데 볶음국수가 나왔고 돌아올 때는 사진상에서는 다소 부실해 보이는 아침용 요리가 나왔다. 하지만 소시지, 계란, 감자의 맛이 정직하게 나서 맛이 없는 식단은 아니다. 그리고 대한항공은 구아바주스가 맛있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이코노미에서 간식을 주는 달달한 땅콩 너무 맛있어서 맥주랑 같이 먹는 것이 나의 대한항공을 타는 즐거움이었는데... 이제 땅콩 서비스 안한다고 한다.


# 아시아나항공

1 : 인천-시드니 / 2 : 인천-호치민

한때는 기내식 맛집으로, 그리고 기내식 사건으로...아무튼 기내식 쪽으로는 꽤나 역사적인 항공사. 업체가 바뀐 이후로 확실히 맛과 서비스가 많이 떨어졌다(기분 탓일 가능성도 크다). 사실 이건 업체 문제가 아니라 항공사가 서비스를 줄이면서 품질이 떨어진 경우라고 혼자 해석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시아나 장거리 노선을 대표하는 쌈밥은 여러사람이 최고의 기내식으로 꼽는 메뉴다. 시드니 가는 노선에서 먹어봤는데 쌈이라는 특성 때문에 먹는 재미와 시간이 더해져서 무료한 비행 시간의 재미가 된다는 점에서 좋았다. 뜨거운 물을 바로 부어주는 블록된장국까지 있기 때문에 제법 그럴듯한 식사 느낌이다. 다만 불고기는 조금 질기다. 호치민 갈때 먹었던(갈 때인지 올 때인지는 기억이...) 메뉴는 비행시간이 짧아서 그냥 불고기였다. 고기 맛은 비슷했다.


 # 아에로플로트

1 : 인천-모스크바 / 2 : 모스크바-인천

러시아항공은 사실 서비스 별로라고 유명했던(지금은 개선과 노력을 거치면서 평균 이상의 서비스는 갖춘 것 같다) 항공사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프리미엄이코노미석이었기에 괜찮은 좌석과 식사를 얻었다. 좌석은 이코노미에 가깝지만 식사는 비즈니스와 같은 메뉴가 제공된다고 들었는데 비즈니스에 제공하기엔 좀 부족해 보이는 식사다. 전반적으로 맛은 괜찮았는데 간식으로 제공되는 과자들은 별로다. 닭고기를 싫어해서 다른 메뉴가 먹고 싶었으나 남은 메뉴가 치킨밖에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먹었는데 의외로 고기가 부드러워서 잘 먹었다. 무엇보다 비행기에서 뭔가를 맛있게 먹으려면 좌석이 조금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비행이었다. 노르웨이로 가는 연결 편은 간단한 샌드위치만 나왔다.


# 진에어

짧은 비행에서는 소화력도 떨어지는데 뭔가 먹을 필요성을 잘 못 느껴서 저가항공의 기내식을 돈 주고 먹지는 않는다. 무료로 제공되는 경우에만 먹는다. 사진은 라오스 가는 진에어였는데 내가 라오스에 갈 때는 아직 블루라군이 양평이 되지 않은 라오스여행 유행 직전이라 직항편도 진에어 하나뿐이었다(아니 라오스가 어쩌다 청춘 여행지가 된 겁니까? 제가 본 라오스는 전혀 아니었는데요...). 사실 저가항공 자체가 지금처럼 많을 때가 아니라 추가 요금 없이 기본으로 제공되는 기내식이었다. 저가항공답게 콜드밀이고 맛은 보급형 뷔페에서 나오는 메뉴들의 맛. 딱 보이는 그대로, 예상되는 아는 맛.


# 상하이항공

1 : 인천-상해 / 2 : 상해-인천(대한항공편)

상하이항공의 기내식은 딱 한가지로 기억된다. 맛이 없어... 인천-상해 노선인데 발권이 참 복잡해서 동방항공으로 예매를 했으나 갈때는 동방항공의 자회사인 상하이항공을 타고, 돌아올 때는 스카이팀 멤버인 대한항공을 타는 요망한 스케줄이었다(동방항공으로 발권했는데 동방항공 못타봄). 일행들은 당근을 집어 먹다 뱉었고 나도 사이드 메뉴는 열지도 않았다. 돌아올 때 탄 대한항공의 기내식은 일행에게 중국항공사의 기내식보다는 괜찮다는 평가를 들었으나 딱 단거리 노선 다운 식사였다. 기내식은 평등하게 맛없다는 나의 편견을 한 번에 고쳐 준 식사였다. 맛있는 기내식은 없어도 맛없는 기내식은 있다.


# 특별기내식

1 : 캐세이퍼시픽 인천-타이페이 / 2 :  카타르항공 인천-카타르 /  3 : 올림픽항공 아테네-이스탄불

기내식을 잘 먹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소화력이 약해서 기내에서 잘 못 먹는다. 그래서 기내식이 제공되는 단거리 노선에서는 라운지에서 밥을 먹고 비행기에서는 간단한 과일식(이라 쓰고 그는 좋은 안주가 된다)을 미리 신청하는 편이다. 종종 이용하는 특별식의 묘미는 이코노미에 탔지만 조금은 특별하고 싶은 발악이랄까? 사진은 케세이퍼시픽의 인천-타이베이 노선 기내식이었는데 과일+건과일 구성이라 맛을 따질 필요도 없는 구성이었다. 다만 돌아오는 비행기가 4시간 정도 지연되는 바람에...라운지에서 우육면을 세 번쯤 먹으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저것만 먹고 돌아오니 배가 고팠다.

생수가 같으며 화질이 심령사진 수준이라 잘 안 보여서 자칫 같은 항공사로 보일 수 있지만 두번째 사진은 카타르항공이다. 카타르항공은 특별식도 괜찮은 편이라기에 저염식을 주문해보았는데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사진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지만 스테이크였고 일반식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풍 시즌이었던 이날 비행기는 내가 만나 본 최악의 난기류를 만났고 계속되는 터뷸런스는 기내식 배식을 두어 번 중단해야 할 정도였기에 늦게 받은 기내식을 몇 번 먹지도 못하고 체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괴로웠다.

마지막 사진은 특별식이 아닌 어엿한 기내식. 올림픽항공의 아테네-이스탄불 노선에서 나눠 준 샌드위치다. 유럽 항공사들은 이런 식으로도 기내식 서빙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해 준 최초의 기내식이다.


# 비즈니스

1: 인천-뉴욕 / 2 : 샌프란시스코-인천

어쩌면 이 글의 목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탄 아시아나 비즈니스석의 강렬한 추억. 2020년이면 소멸되는 마일리지를 처리하기 위해 인생은 한방이 아니지만 마일리지는 한방에 써야 한다는 어느 명언에 입각하여 아시아나 미주노선 비즈니스를 발권했다. 기내식 맛과 상관없이 승무원님께서 내 코트를 받아 옷장에 걸어주실 때 이미 맛있었다. 기내에서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는데 맛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 스테이크가 역시 지상에서 불에 바짝 구운 맛은 아니었고, 미국 여행에서 좋은 스테이크를 먹은 뒤 돌아올 때는 얌전히 한식을 먹었다. 그리고 사실 비즈니스의 묘미는 본식이 아닌 간식 아니겠는가. 누군가 스타트를 끊으면 비즈니스석은 어느새 라면파티가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 먹고 자던 사람들이 하나씩 깨어나 눈치게임처럼 라면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장거리 비즈니스 비행의 하이라이트다. 누워서 편하게 놀았더니 그렇게 안되던 소화도 잘 돼서 배가 계속 고팠고 라면, 과일, 샌드위치 등등을 계속 먹었다. 처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리기 싫었다.


불 꺼진 기내에서 숨죽여 먹는 비즈니스 뽀글이와 과일의 맛...



인간의 기억, 특히 한국인의 기억은 음식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먹는 기내식을 여행 그 자체로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다.

어설프게 자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장거리 비행이 끝나기 두시간 전 찾아오는 기내식을 받아 들고 도착 후 힘든 일정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밀어 넣기도 한다.

낯선 음식으로 가득하던 해외에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비빔밥을 먹으며 고향을 느끼기도 한다(물론 그 식사는 해외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서정적인 특별함 이외에도 탄생 자체가 특별하기도 하다.

특수한 상황에서 먹기 위해 조리 방법, 시간, 메뉴, 운송, 검역, 심지어 종교에 걸친 내가 들은 기내식 세계의 TMI만 해도 수십가지다.

맛이 없네 어쩌네 말은 해도 기내식만큼 특별한 식사는 없다.

기내식을 먹는다는 건 여행을 간다는 의미니까!

나는 기내식을 먹는다. 고로 여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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