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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May 11. 2020

미국에서 먹어야 하는 것

미국엔 미국 음식이 없다

여행의 즐거움이자 목적은 먹는 것이다. 최소한 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에 가면 뭘 먹어야 할까?

일단 떠오르는 것은 햄버거다.

한국에서 햄버거는 많이 먹으면 엄마한테 혼나는 저렴한 정크푸드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미국에선 햄버거가 전통음식이고 어엿한 식사다.

함부로 정크푸드라고 부를 수도 없다.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맥도널드와 같은 햄버거 가게를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스베가스의 고든램지의 햄버거 가게에서 두명이 식사한다면 십만원 정도는 우습게 나온다.

라스베가스 고든램지버거레스토랑, Hell 키친답게 불꽃 장식이 돋보인다, 사실은 가격이 헬

이제는 한국에도 들어온 쉑쉑버거나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버거 브랜드 인앤아웃이나 파이브가이즈도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비빔밥 가격이 휴게소의 몇천 원짜리부터 특급호텔의 몇만 원짜리까지 다양하게 형성된 것과 비슷한 원리다.

좋은 재료로 만든 햄버거는 정크푸드가 아니고 제대로 된 한 끼다.

뉴욕에서 유명한 세 개의 버거집 쉑쉐, 파이브냅킨, 파이브 가이즈. 가격, 분위기, 포장상태까지 모두 천차만별

햄버거에 대한 인식처럼 미국 식생활에 갖는 편견이 종종 있다.

미국 사람들은 다 햄버거 같은 건강에 안 좋은 음식만 먹어서 고도비만이 많다는 인식은 일부만 맞다.

밥 두세 그릇은 먹는 나에게도 많게 느껴지는 식사량이나 소름 끼치게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때면, 미국에서 살 빼서 돌아가는 것보다는 금연이 쉬운 일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뉴욕 르뱅베이커리 쿠키와 샌프란시스코 기라델리 선데아이스크림. 시차를 극복하게 만드는 단맛.

하지만 알다시피 코끼리도 풀만 먹는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초고도 비만도 미국인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배우도 미국인이다.

미국 길거리에서 백 명이 지나가면 백개의 체형이 보인다.

평범한 미국의 식사는 의외로 가볍다.

뉴욕 소호의 초바니요거트카페와 호스텔의 조식. 그냥 이정도가 평범한 밥이다. 베이글과 머핀 몇 종류만 나오는 호스텔의 조식도 외국인들은 꽤 잘나온다고 평가했다.

오이와 당근 스틱에 크래커 몇 조각을 식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매일 기름기 흐르는 고기만 먹을 것 같지만 샐러드만 먹는다.

스프 한컵에 빵 하나면 식사라고 부른다.

주로 먹는 식재료는 달걀과 감자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뉴요커들에겐 길거리에서 파는 핫도그와 조각피자가 주식인 경우도 많다.

인건비와 임대료 비싼 뉴욕엔 푸드트럭이 많다. 첫번째 사진의 할랄가이즈는 길거리음식이지만 뉴욕 맛집투어 코스로 불린다. 두번째 사진같은 핫도그는 미국 전역에서 판다.

할랄 가이즈 같은 싸고 양 많은 길거리 음식은 미국인에겐 중요한 식사다.

한 끼 한 끼가 소중한 한국인은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그들은 머핀이든 스테이크든 그냥 뭔가 먹었으면 식사가 끝난 거다.

베이글과 커피로 끝나는 미국식사 보다 고기 먹고 볶음밥에 냉면까지 먹어야 하는 한국의 식사가 더 위력적이다.

아마도 미국 식생활에 대한 오해는 디저트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미국의 본식이 수십 가지 조리법으로 만든 달걀과 감자 요리라면 디저트는 설탕이다.

트립어드바이저 상위 랭킹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브런치 레스토랑들. 달걀과 감자가 주요재료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수준이 아니라 그냥 설탕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단맛으로 유명한 터키에서도 이렇게 설탕이 흔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나는 단맛을 워낙 좋아하고 머리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 음식도 잘 먹는다.

그런 내가 느끼기에 미국의 단맛은 비범했다.

내가 먹어도 달 정도라면 보통의 한국인들은 먹기 어렵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크로넛(크로아상+도넛). 뉴욕의 유명 베이커리 한정판매 제품인데 먹고나면 입에 설탕이 돋아난다.

그렇다면 햄버거 이외에 미국음식은 뭐가 있을까?

여기부터는 답변이 어렵다.

전통음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스테이크나 몇몇 음식을 말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유럽인들의 식생활이 그대로 옮겨갔을 뿐이다.

미국 고유의 음식이라 부르기엔 부족하다.

필라델피아치즈스테이크처럼 확실하게 지역 이름이 붙은 음식은 드물다.

심지어 필리치즈스테이크란 이름만 봐선 고깃덩어리지만 실상은 다진 고기가 들어간 핫도그와 햄버거의 중간쯤 되는 음식으로 대단히 독창적인 형태는 아니다.

필라델피아의 명물 필리치즈스테이크. 자유의 종과 함께 필리의 상징. 나이프 들고 썰어 먹는 고기가 아니라 촵촵 다진 고기가 들어 간 빵이다.

그렇다면 미국에 가면 뭘 먹어야 할까?

그냥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된다.

미국 안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적고, 있어도 아직 전통음식이라고 부를 단계는 아니다.

대신 이민자가 들고 간 전 세계의 음식이 그곳에 있다.

이민을 가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떠났던 시기에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지 못한다.

음식이라고 다를까?

한인타운 마트에 가면 꽃게무침부터 삼색나물까지 모든 종류의 한식 반찬이 있다.

여행 갈 때마다 각종 반찬을 챙기는 한식러버들에게 미국에서만큼은 그러지 말라고 말하겠다.

캐리어에 꾸역꾸역 넣을 수 있는 음식보다 현지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신선한 한식이 더 많다.

지하철에서 잠깐 졸다 파리바게트에서 산 커피를 들고 있는 뉴요커를 만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잠시 혼란스럽다.

서울시 아니고 뉴욕시 한인마트 반찬 코너.

한인타운의 대명사인 LA 여행을 갔던 한국인이 미국에서 먹은 한식이 그리워서 다시 가고 싶다는 식의 도시괴담은 사실에 근거한다.     

음식문화는 다른 문화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

아프리카까지 직접 가는 사람보단 아프리카 음식점에 가본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각국의 이름을 건 맛있는 식당에 간다.

많은 미국인이 멕시칸 푸드를 소울푸드로 생각한다.

볶음국수와 볶음밥이 메인인 중국음식점 판다익스프레스도 흔하게 보이는 체인점. 멕시코와 국경이 닿은 샌디에고는 타코같은 멕시칸 음식이 제일 흔하다.

옆집과의 경쟁, 같은 메뉴와의 경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음식과 싸워 살아남은 것들이 미국에 있다.

인앤아웃을 먹기 위해 치열하게 줄을 서는 것보다는, 이상하게 현지인들이 계속 들어가는 태국식당에 들어갔을 때 더 좋은 음식을 먹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미국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쌀국수였다.

12월의 뉴욕은 추웠고 이틀에 한 번씩 햄버거를 먹던 중이었다.

미국식 식사가 질린 건 아니고 한식이 먹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트립어드바이저 검색 중 보인 쌀국수가 먹고 싶었다.

우연히 찾아간 베트남 식당의 음식은 두 번의 베트남 여행에서 먹었던 그 어떤 쌀국수보다 맛있었다.

그때부터는 한식만 아니면 아무거나 먹었다.

물론 뉴욕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필리치즈스테이크를 먹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클램차우더를 먹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꼭 먹어야한다는 클램차우더스프와 던지니스크랩.  냄새없는 게라고 하던데 차가운 조리법으로 먹긴했지만 냄새가 좀 적긴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음식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미국엔 미국의 전통음식은 없지만 다른 나라의 전통음식은 있다.

미국 사람들도 미국 음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냥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제일 맛있고 편하다.

처음엔 유럽인, 지금은 지구의 모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의 전통음식은 멜팅팟(Melting Pot) 하나뿐이다.

필라델피아 크리스마스마켓의 황홀한 광경. 그래도 이런 걸 보면 미국다운 요리 방법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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