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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Mar 29. 2016

서울 정동

골목골목에 스민 수많은 이야기와 숨바꼭질

서울 정동은 언제 가도 아름답고 고즈넉한 정취가 흐르는 곳이지만, 알고 보면 가슴 저릿한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 오늘 정동길을 걸으며 그 시절의 고독과 낭만에 젖어든다.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보란 듯 계절마다 자연의 꼬까옷을 바꿔 입는 곳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 눈 덮인 교회당, 오월의 꽃향기. 이영훈이 짓고 이문세가 노래한 <광화문연가> 몇 소절을 저절로 읊조리게 되는 정동길이다. 일 년 중에 가장 춥다는 소한 무렵에도 볕 좋은 날의 정동은 따사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바닥에 코를 박을 듯이 한껏 몸을 움츠린 채 바쁜 걸음을 걷던 이들도 이곳 정동에 들어서면 조금씩 발걸음을 늦추곤 하는데.



격변하던 근대기의 영광과 생채기가 한 데 엉켜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이 도성 안에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여 나라의 역사를 새로 쓸 만큼 강인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여생을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야 했던 외로운 사내였다. 첫 번째 아내를 잃고 신덕왕후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그녀를 묻은 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매일같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신덕왕후 옆에 묻어달라고 했을 만큼 신덕왕후를 아꼈는데 신덕왕후와 대립하며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이방원은 이를 마뜩잖게 여겨 이후 이성계는 도성 동쪽 건원릉에 잠들게 되었고, 정릉은 도성 밖으로 이장되었다. 더 이상 정릉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 최초의 러브스토리가 배어 있는 정동은 시작부터가 낭만적이다.  


한양도성 안에 있지만 서쪽 변방에 조용히 자리하던 정동이 존재감을 내보이기 시작한 것은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이 제국 열강들의 강압에 의해 개항을 하면서부터이다. 1883년 5월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정동 곳곳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 공사관이 차례로 들어섰다. 뒤이어 선교사들이 그 일대에 서양식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우면서 정동은 외교의 중심이자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퍼져나가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정동이 예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인 멋이 깃든 거리가 된 것은 격변하던 근대기의 영광과 생채기가 한 데 엉켜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 외국 공사관들과 함께 덕수궁 돌담 너머에 붉은 벽돌로 쌓아 만든 양옥 건축물 대부분이 100여 년의 시간을 머금고 우리 앞에 서 있다. 정동 한 가운데 정동 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 동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중명전, 구세군 중앙회관, 성공회 서울성당에 이르기까지 정동을 둥글게 한 바퀴 걷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역사의 현장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소월이 진달래꽃을 노래하고 관순이 두 손 모아 기도하던

노란 머리칼과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조선 백성들에겐 도깨비와 다름없었다. 지나가다 마주치기만 해도 어디론가 줄행랑을 치던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성 안팎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고자 한 그들의 노력은 한결같았다. 선교에 앞서 조선인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앞장섰던 것.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 배재학당과 1886년 스크랜턴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이다. 그 속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소월이 진달래꽃을 노래하고, “대한독립만세”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꽃다운 유관순이 또랑또랑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김소월과 유관순 외에도 숱한 인재들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거쳤는데 옛 학당의 모습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과 배재학당 동관에서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1915년에 지은 심슨기념관은 1922년 증축하고 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된 것을 복원하여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916년에 지은 배재학당 동관은 배재학당뿐만 아니라 우리의 근대사를 차분히 느낄 수 있는 역사박물관으로 단장해 그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지긋한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부모님 손잡은 어린아이들까지 박물관 문턱을 넘는 걸음걸음이 가뿐하다.  


지척의 정동 제일교회는 1887년 아펜젤러가 스크랜턴의 한옥 두 채를 빌려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이다. 1897년에 지금의 붉은 벽돌 예배당을 새로 지었는데 예배를 드린 신자 대부분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02년생 동갑내기인 김소월과 유관순이 이곳에서 함께 기도를 하진 않았을까? 1919년 3.1 만세운동에 나섰던 유관순은 이듬해 생을 마감했고, 김소월이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1922년이니 두 사람 사이 애틋한 인연은 없었던 듯하나 나라 잃은 슬픔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그들이 담장을 나누던 두 학당에 다녔다는 이야기만으로 나란히 앉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종교 이상의 가치를 품은 정동의 예배당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녘이면 거리마다 번져나가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근대기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구세군은 1928년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 모은 헌금으로 정동에 구세군 사관학교를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폐교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문을 열게 되는데 오늘날 이곳은 자선냄비 본부로 운영되고 있다. 중앙 현관에 우뚝 선 4개의 석조 기둥과 그 위에 얹어진 박공지붕이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건축 당시에도 장안 10대 건물에 꼽힐 만큼 위용을 떨쳤다고.


우리나라 근대기 대부분의 교회들이 높은 천장과 수직으로 뾰족하게 솟은 첨탑, 화려한 색깔의 유리창으로 상징되는 고딕 양식의 예배당을 지은 것과 달리 성공회 서울성당은 이웃하고 있는 덕수궁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둥근 아치가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접목하였다. 1922년 영국인 건축가 아더 딕슨이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한 성당은 일제의 간섭과 자금난, 설계도 분실 등의 이유로 1926년 미완성인 채로 헌당식을 가졌다가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설계도 원본이 발견되어 지난 1996년 5월 자그마치 70년 만에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당에 들어서자 안내봉사자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당 안으로 이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띠살문과 전통 오방색의 조형미를 활용한 창문을 내고 기와를 얹어 성당 지붕을 완성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의 음성과 표정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성공회 서울성당은 이미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유산이다. 건축적인 측면과 함께 1927년부터 1939년까지 11년에 걸쳐 제작된 모자이크 제단화와 2층 높이의 파이프오르간, 나선형 계단 아래에 위치한 지하성당 등은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이 떠오를 만큼 색다른 정취를 전한다.  


한편 민족대표 33인이 선포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곳이 정동 제일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뒤였고, 민주화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성공회 서울성당의 앞마당이다. 이처럼 정동의 예배당들은 특정 종교와 종파에 국한할 수 없는 우리 근대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오랜동안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다.



달콤 쌉싸름한 가배 한 모금으로 마음을 달래어

향긋한 커피 향기 피어오르는 카페가 정동길 군데군데 자리를 트고 있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 내다보이는 정동길 중간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잠시 쉬어 가는데 옅은 미소 머금게 되는 살가운 풍경들이 스친다. 엄마 손 꼭 잡고 길을 걷는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엄마들은 맞장구치기 바쁘다.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모습도 참 정답다. 손난로 삼아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여행자들도 골목길 여기저기서 분위기를 탄다.  


높다란 3층 망루만이 남아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 앞에 다다른다. 정동이 결정적으로 우리 근대사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궁을 떠나 이곳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1896년 2월의 아판파천俄館播遷을 전후해서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지만 부인인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견뎌내고, 나라는 제국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 애처로움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3층 탑에 오르면 정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테지. 그곳에서 고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흰 회반죽 칠 때문인지 덩그러니 솟은 구 러시아공사관은 어딘가 더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의 일 년, 고종의 쓰라린 마음을 달랜 것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 미스 손탁이 내어주던 가배 한 잔이었다. 당시 커피를 가배라 불렀다. 미스 손탁은 고종의 바리스타였던 셈. 당시 커피라고 해야 뜨거운 물에 각설탕과 커피가루를 넣은 것이니 바리스타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만 고종은 미스 손탁의 커피에 적잖이 위로를 받았던 듯하다.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어한 후에도 커피를 즐긴 한편 미스 손탁에게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했다. 몇 년 후 미스 손탁은 그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을 짓고 1층에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인 정동구락부를 열었는데 현재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자리이다.  


가까운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덕수궁 담장을 넘어 정동 거리로 퍼져나갔을 고종의 커피 향기를 좇아본다. 여느 동네 카페에서와 다르지 않을 흔한 커피 향기가, 습관적으로 마시고 멋스럽게 즐기는 커피 맛이 이곳 정동에서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전혀 관계없을 것만 같은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지만 정동길 구석구석에 고개 내민 이야기들을 더듬으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나 먼 훗날에 누군가가 이 거리를 걸으며 오늘의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을까.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은 사라질 뿐이니 이 땅과 이 거리 그리고 그 위를 내딛고 있는 우리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걷는 길 곳곳 근현대의 희로애락이 배인 정동에서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2월호 '서울 정동'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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