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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Oct 18. 2019

수다와 대화 사이에서  

대화에 관하여

알수 없는 불편함 


모처럼 연락이 닿은 친구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반갑고 훈훈한 이야기와 그의 근황을 잘 듣고 왔다. 알차고 들을만한 정보가 넘쳐난다.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왜 진작 이런 친구를 가까이 두고 지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왠지 답답해지고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다. 처음에 잘 지각이 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누워서 돌이켜 보니 무언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에는 좋은 대화였지만, 지날수록 나를 쫓기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대화가 있다. 어떤 순간순간에는 그다지 자각도 되지 않은 체 나는 그러한 대화의 물결 안에 나를 맡길 때도 적지 않다. 분명 그러한 느낌을 주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맡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서두에 꺼내는 말이 있다. 수다와 대화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무엇인 것 같은 가? 사전적인 정의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뇌피셜로는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 물론 수다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저 차이일 뿐 때로는 수다의 순기능도 만만치 않다. 가벼운 수다, 무거운 수다, 비판적 수다, 전두엽을 활용하는 수다, 좌뇌를 주로 쓰는 수다, 뇌피질만 활용하는 수다 등등.. 수다의 결과 질도 여러 가지이니 듣고 안 듣고의 기준이 애매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영성의 존재이므로, '듣는 다'는 것이 주는 공감의 분위기에 아주 아주 민감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듣는다는 것이 대화로 가는 기본사항이라는 입장을 나름 정리해 두고 있다. 그럴싸하지 않는가? 그래서 수업시간에 떠드는 사람은 죽는다 -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우리는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시간을 보내는 가이다.  




대화는 공이다?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들어 보면 대화를 공놀이를 하는 것에 자주 비유를 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비유가 썩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공을 상대에게 던져주고 또 받으면서 한 문장씩 주고받는 의사소통 훈련을 해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해 보면서 나는 약간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대화가 지니고 있는 게임의 성격을 확실히 간파한 사람이 정립한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대화는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순간적 판단의 게임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 대화를 공놀이로 시각화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떤 대화를 하는 가? 어떤 대화를 하는 사람과 만나는 가? 아마 이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생각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질, 어쩌면 미래를 어느 정도 결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정교하게 공놀이를 떠올려 보자. 축구를 하는 선수는 공을 지니고 플레이를 한다. 공을 지니고 플레이를 할 때 내가 옆에서 패스를 주거니 받거나 하면서 함께 골대로 갈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 공을 뺏고 압박을 하며 태클을 걸 수도 있다. 미처 내가 패스할 타이밍을 놓치고 상대가 공을 빼앗아 간다면, 그는 아마 같은 방향의 골대에 공을 넣을 생각이 없는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재빨리 내가 다시 공을 빼앗아 와야 한다. 이제 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마음도 급해진다. 


이러한 축구의 패턴을 조금 염두에 둔다면 대화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실제적인 공이  존재한다. 주제, 테마, 의견, 증거와 관련은 있지만 대화 그 자체는 아닌, 확실하고 구체적인 분위기의 공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함께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날 훈련의 피로도가 결정된다. 사실 유니폼의 색깔, 스코어, 골대의 방향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공을 잘 다루고 패스의 줄기를 찾아서 좋은 훈련을 하며 성장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상대의 공을 다루는 여유와 패스 줄기를 잘 찾고 주고받는 감각을 지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을 잘 받아 또한 나만의 기술로 다루고 적당한 패스 타이밍에 알맞게 전달해 준다면 서로가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대화중 내가 의견을 개진하는 반만 줄여도 훨신 분위기는 살아날 것이다. 


그러한 대화에는 아마 성장이나 만남의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작 본 경기가 세상에서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는 듣는 기술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어느 정도 지성을 지닌 사람들은 알맞고 좋은 이야기를 잘 해낸다. 제법 바른 매너와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의 룰과 알맞은 배려만이 능사는 아닐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나에게만 공을 주고 마음껏 가지고 놀게 한다.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이 나를 가지고 놀았더라.) 대화에서 '듣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련된 매너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지성과 능력을 겸비한 그 친구와 만나서 내가 시간이 흐른 후에 느끼는 쫓기는 심정은 단지 불편한 매너에서 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다소 투박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만남의 시간이 존재했었다고 할만한 대화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한 대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대화에서 나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내가 마음 놓고 누군가를 만났고 아울러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의 상태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글쎄 이 부분은 조금 애매하다. 착각이 개입될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의 상식 수준에서, 상태는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실제 하는 눈에 보이는 공이다. 듣는 다 - 는 것은 사실은 마음의 상태일 수가 있다. 좋은 매너와 세련됨으로 무장해서 당장 좋은 인상을 줄 수는 있지만, 오랜 뒤에 문득 다시금 시간을 곱씹고 작은 여유를 주며, 또한 나를 만나게 해주는 거울 같은 시간은 결국은 진정 상대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결국 대화에는 상태가 담긴다.


나는 그 친구가 나에게 느끼게 했던 '그것'이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는 굉장히 좋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좋은 이야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 그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상태를 설득하지 못했을 뿐이고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한 것들을 들을 수 있지만 그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열린 귀가 없다면 오히려 화려한 이야기들은 나를 이상하게 초라하게 만든다.


대화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도사리고 있는 주도권 싸움, 과시, 불안, 뜻모를 정보 등등 수많은 암시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단어의 이해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대화에는 아마도 어떤 액세서리로 치장해야 하는 속물주의나 얼굴에 써야 하는 가면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미처 준비 못한 나의 부주의함이 나를 쫓기게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에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지낸다. 마음의 상태는 사실상 그런 것과 무관하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 어떠한 결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까? 미디어의 뉴스와 감각적이고 현란한 발 재주를 지닌 선수들과 만나고 있는 가? 아니면 투박하지만 내가 나를 만났다고 느끼게 하는 그 성장의 순간을 만나고 있는 가? 대화와 수다의 어느 지점에 선체로 우리는 누구와 만나게 될까? 대화는 미디어에서 우리에게 끝없이 암시하는 공적인 위계, 공포와 불안, 감각적인 문화의 큰 파도에서 외출한다는 것이다. 문을 열고 마음의 앞뜰에 외출하여 나의 집 앞마당에 선채로 나의 눈길과 진정한 만남을 기다리는 손님을 맞이 하는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 나는 나를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의 미래가 그 순간순간과 결부될 것이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그런데  한번쯤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 혹은 사물이 지닌 상태를 서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현실적인 만남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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