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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Jan 28. 2021

나는 존재에 우선하는 가?

어느날 새벽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을 깜빡 졸다가 동물의 울음소리 같이 내지르는 기기의 신호음 덕택에 금세 눈을 떠버렸다. 간헐적인 신호음 소리, 사람들의 분주한 주고받는 지시와 응답의 대화들, 적막한 고요 속을 나지막하게 원래 그렇듯 낮게 깔리는 환자들의 신음. 그렇다. 여기는 응급실이었다. 나는 그저 좀 어이가 없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일과 결정의 반복이었을 뿐이데, 여느 때와 달리 나는 응급실에 실려와 있다. 단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일을 처리했을 뿐인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나를 굉장히 드라마틱한 어떤 환경 속으로 내 몰았다.


그즈음에 나에겐 두 달새 서너 가지의 프로젝트가 몰려왔다. 조금 바쁘긴 하겠지만 해오던 일이었고 한때는 이 보다 더한 조건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던가! 나는 세부적인 일정과 사전 준비를 했고, 일정대로만 잘 처리하면 이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일인 다역을 하면서 처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잘해놓고 나면 어쩌면 나에게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과욕이었는지.


거의 이삼십 분 단위로 쪼개서 두어 달을 보내며 닥친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작업 이후에 심하게 두근거리며 잠이 오질 않는다. 촬영은 이틀째 진행되고 있었고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일정이 시작되는데 잠을 잘 수 없다니, 잠이 안 오는 것뿐만 아니라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 이건 무슨 조화이지? 심장 두근거림과 내일 일의 걱정 때문에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증세가 일종의 엑셀레이팅이 되고 있었다. 심장이 점점 더 조여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더 이상은 홀로 내일까지 공포에 떨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곧바로 나는 응급실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선 검사부터 했다. 1차 검사를 하고 나서 4시간 이후에 재검사를 해야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한 것이다. 참 처음 겪어 보는 어떤 존재의 불안을 아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어떠한 '상태'를 정말로 인지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도 제대로 깨달았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 왔던 나의 능력치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누구의 잘못된 방해도 없이 그저 내가 스스로 약해빠진 멘틀과 수준을 한 번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2차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플랜 B부터 C, D까지 모두 떠올려 보았지만, 모두가 다 까다롭고 번거로운 과정으로 가는 괴로운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일 벌어질 상황에 대한 책임, 걱정과 함께 나를 심각하게 불안하게 만든 것은 묘한 고립감 같은 것 들이었다. 병원에서 조차 나는 주변 상황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누운 채 병원의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부재의 느낌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물들을 보고 인지는 하되 그것들과 관계가 없었다. 나의 현재 몸의 상태를 나는 모른다. 잠을 며칠째 못 자고 있다. 내가 보는 것들이 나의 시간과 상관없이 보이지만 나와 아무런 의미도 관련도 없이 그저 보이기만 하는 느낌 - 급하게 의사들이 처방해준 약기운인가? 아니면 수면부족과 불안의 증세인가?


그날 밤 나는 점점 더 현실에서 이탈해 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날 검사 결과가 커다란 문제는 없었고 과로와 다소간의 불안 강박적인 스트레스에 기인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그때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 본다. 물론 스트레스와 과로에 기인한 일시적인 조절장애라는 간단한 증세를 알고 난 이후에도 내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내가 현실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주변 사물들과의 관계들, 질서나 내적 상태는 사실상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들에 의해 그 질서가 흐트러질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상태를 깨닫는다. 나는 나 자신과 환경이나 인지하는 과정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누군가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무엇일까? 이건 사회적 통념으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오로지 경험 또는 영감에 의해서만 그것도 드물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내적 질서와 사물들, 타인과 외부 세계에 관한 나의 상태들- 이것을 심리적으로 '투사'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어떤 용어로 수렴될 성질은 아닐 수 있다.  그날 나는 아마도 기묘한 신경증을 경험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내가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 보고 듣고 이해하는 나의 내면의 인지적인 회로와도 관련이 있으며, 그 상태를 나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불투명해질때 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의 본질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 졌을때, 나와 현실은 새로운 관계설정이 가능하다. 그때 나는 본질의 시간들을 불러내어 볼 수도 있다. 내가 아니라 존재의 시간 속에 머물러 보는 것이다. 나는 실존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어떤 믿음이나 겸허함, 또는 사랑이라는 속성 속에서만 실존적으로 성립이 가능한 존재일 수도 있다. 홀로 나는 믿을 수도 독립적일 수 조차 없는 하나의 전적인 착각의 산물일 수도 있다면, 나는 무엇과 신뢰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     


일상 속에 평온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 따분하고 별일 없는 하루,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고통에 상심하는 시간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시간들은 기적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감사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퇴원 이후에 상황이 일단 제자리를 찾고 사물들이 비로소 나에게 그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스스로 상황을 존재시키고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겸허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매일이 기적'이라는 말이나 '감사하면 삶이 변화한다'는 그런 문장들이 고통과 불안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스스로의 상태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만 가장 확실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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