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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03. 2021

그 여름이 지금 여기에

소울이 내 방에 깃드는 순간

햇살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뜨거운 열기를 서서히 거두어들이고 있다. 여름은 지속되고 있다.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그래도 강렬한 햇살의 속성이 한풀 꺾이며 방안 물건들이 지닌 무심한 속성들이 빛을 반사하는 색채감으로 다시금 드러나는 시간에는 모든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게 한다. 나는 한물간 소울 음악을 틀어놓았다. 아니 사실은 최근에 가장 실력이 좋은 뮤지션들이 모여서 새롭게 내놓은 앨범이다. 어린 시절 가끔 보곤 했던 sesami street라는 어린이 교육 만화 클립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왔던 핀볼 숫자 노래가 첫 인트로로 배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새로운 세대의 소울 뮤지션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힙하게 트렌디를 따라가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다.


브랜든 윌리암스의 2014년 앨범은 소울과 재즈 뮤지션의 대규모 콜라보로 탄생했다. 연주와 보컬의 음악적 앙상블이 인상적이다. 라운지 소울에서 훨신 음악적으로 단단한 뿌리가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재즈와 소울 뮤지션의 음악을 들어왔다. 이건 그저 나의 낡은 향수 어린 수집벽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런 음악들은 나의 타협 없는 영혼과 한결같은 친구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만나 주었다. 이런 음악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소울과 재즈는 대화의 음악이다. 연주자들은 각 파트를 연주하면서 미리 짜 놓은 파트를 연주하면서 서두를 꺼내고 서로의 온도를 체크하거나 형태를 관찰하다가 서로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 다시 스스로의 톤을 조절한다. 이것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끼리의 기술이다. 이런 종류의 즉흥음악이나 표현주의적인 회화를 접하는 감상자들은 다차원으로 열린 자신의 미시적인 감각들과도 함께 대화해야만 한다. 아마 나는 그런 섬세한 배려와 하모니의 한가운데에 둘러싸여 있는 그런 아늑함이 좋았었나 보다. 문화가 의복이라는, 사회 심리학적인 정체성으로 개인을 둘러싼다는 그런 약간의 미학적인 정의와도 어울리는 그런 맥락에서도 사실일 것이다.   




베이시스트 Massimo Biolcati의 2021년 앨범. 최근의 재즈는 더욱 미니멀해지고 또는 복고적인 악기편성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만큼 압도적인 불편함이 있다면, 역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이해나 대화의 다양한 감정이나 소망에서 또한 해답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한 동안 나는 소울이나 재즈를 듣지 못했다. 어느 기간 동안 해외에서의 체류 문제 때문이기도 했고 오히려 한국의 집으로 돌아와서의 나의 상태가 이상하게 그러한 음악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숙제들이나 사업들에 시달리기도 했고, 어떤 관계의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것이 음악이 사라진 명확한 이유는 아닐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나의 정서는 어떠한 실체 없는 긴장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그것들은 압도적이었다. 아니 처음 그것을 직면할 때에는 적어도 그것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성적으로 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단계적으로 처리한다. 문제들은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이성이나 보이는 현상들을 초월한 명백한 수준의 긴장이나 압도감이 이상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울 음악이 들리자 잊고 있던 그리움이란 것이 울컥 올라왔다. 소울 음악이 오랜만에 울려 퍼지면서 나는 기억에서 삭제했던 이런저런 감정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편성과 색감으로 시작되는 음악이 나의 긴장을 이완시켜 주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의 어떤 상상의 공간 속에서 압도하는 형체 없는 긴장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햇살이 부드럽게 감싸는 실내에서 두 가지 이상의 공기가 나를 감싸고 기묘하게 각자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나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모호하기도 했다. 약만 복용하면 금세 사라지는 단지 심리적인 복합적 원인의 신경 증세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한 번은 만나 해결해야 하는 어떠한 종류의 실존적인 숙제들 일수도 있다. 아마 여름 늦은 오후의 빛들이 사물들의 위태로운 양상들 속에서 어쩌면 나 자신의 볼품없는 감정들이 지닌 이유 없는 상실에 관해 더욱 선명하게 부각해 주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은 그냥 풍경일까? 때로는 원근법만이 썩 만족할만한 재현법이 아닐지 모른다. Henri Biva 앙리 비바는 빛에 반사된 전원 풍경을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실존적인 긴장의 배후를 지닌, 내가 아는 '모든 문제들'은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마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가졌던 기이한 비현실성은 문득 나에게 색다른 낙관성을 선사했다. 그건 사물들이 저물어 가는 여름의 햇살로부터 느껴지는, 모든 것은 유동적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현실의 어떤 속성에 관한 통찰과 같이 눈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었다.   




순간이 공기를 통해 나에게 하는 질문들은 강력하게 압도적이면서도 별다른 대화나 개념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더한 위축감을 주는 것 같다. 꿈에서는 확실한 사건이 형성되어 연관되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언어나 사실로 떠올려 볼 때면 실체 없이 사라지는 것을 때때로 경험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꿈의 차원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완전히 (적어도 현실-언어적인 의미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도리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식의 스토리텔링은 아마도 부질없는 허우적거림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런 불편함을 카프카 같은 문학가들은 부조리라고 표현하곤 했을 것이다. 오늘 들었던 음악 속에서 나는 그것이 압도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해왔고 그런 만큼 실체적이지만, 한편 (음악 속에서) 음악적으로는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느꼈다. 음악이라는 추상적으로 나를 반추하는 과정들 속에서, 내가 노래를 함께 만들어 가는 만큼, 그런 것들이 강하게 나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조금 막연한 통찰이 어느 순간 생긴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프랑스 칸느 근처 르 카레라는 지방 도시에서 머물면서 그저 방안에 깃드는 빛에 의한 평범한 물체들을 예기치 않은 각도로 포착하고 라일락 색과 연두색, 장밋빛으로 채색하며 '자비로운 광휘'를 표현했던 보나르(Peierre Bonnard)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어떠한 '순간' 속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Before Dinner by 피에르 보나르 Peierre Bonnard, 1924 via Met Museum 


이제껏 나의 도착적인 사물을 분류하기, 음악 듣기, 그림을 분석해 오던 어떤 노스탤지어의 취미도 (대부분 예술이라는 이미 분류된 현상들은 십수 년 전의 것들이다.) 그것들이 서서히 나에게 어떠한 질문들을 던지는 긴장을 외면하기 위한 나 혼자만의 다락방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실존적인 긴장의 배후를 지닌, 내가 아는 '모든 문제들'은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마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가졌던 기이한 비현실성은 문득 나에게 색다른 낙관성을 선사했다. 그건 사물들이 저물어 가는 여름의 햇살로부터 느껴지는, 모든 것은 유동적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현실의 어떤 속성에 관한 통찰과 같이 눈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었다.   


오늘 오래된 음악, 아니 신선하게 수십 년 전의 스타일을 나에게 선사했던 이 음악 속에서 문득 그다지 걱정할 상황은 아닐 수 있다는 이해의 장을 선물했던 것 같다. 모든 불편함과 불안한 문제들과 함께 오랜 전통을 지닌 소울 음악을 들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꿈에서 걸어 나와 현실 속에서 숨 쉬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늘 꿈에서 처럼 구체화하지 못하는 다양한 에너지의 연쇄 속에서 압도적인 어떤 문제들을 만나고 살고 있다. 그런 것들이 현실 문제라는 탈을 쓰고 마치 나에게 압도적인 그 무엇으로 의미나 언어로 현시되어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것은 훨씬 다채롭고 미분자적인 명상, 혹은 강렬하게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는 외곽선은 생각보다 선명한 사물이나 의미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이나 유동적인 에너지의 흐름에 불과할 수 있다. 








소울 음악의 진정한 미덕은 음악이나 감정과 대화하는 나의 감각적인 이해만이 확실하게 사실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각성 같은 것이다. 그런 각성은 사실상 언어나 의미로 내가 인지하기 이전의 향수 어린 감정들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결별해 왔던 자신의 잃어버린 다양한 실체들, 내가 직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거울 뒤편에 서 있던 자신의 또 다른 표정들과의 대화들로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그리움이나 상실의 실체를 어렴풋이 나마 알 수 있게 된다. 썩 괜찮은 노래가 있다면, 나와 함께 다양한 실존적 실체인 낙관성, 이해, 그리움, 감정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굳이 다락방으로 숨어들 필요도 없다. (현대의 문화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락방으로의 침잠을 권유한다.)


여름은 당분간 계속된다. 그리움도 계속된다. 어느 누군가가 답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함께 노래를 불러 내어 줄 동반자는 되어 줄 수 있다. 생각만큼 우리는 (소망의 차원에서) 극단적으로 비참한 상황에서 놓여 있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현시적인 그 어떤 의미나 단어, 물건들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만큼 압도적인 불편함이 있다면, 역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그 어떤 이해나 대화의 다양한 감정이나 소망에서 또한 해답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러기에 나는 비참함과 동시에 낙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작가들이 집요하게도 주시했던 그 순간들은 탐미적인 만큼 내밀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앞서간 작가들이 풍경을 통해 보여주었던 통찰이 우리에게 '거룩함' 또한 함께 선사해 주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이나 풍경들이 전적으로 내가 경탄할만한 축복된 믿음 속에서야 확실하게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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