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의 뮤비 ‘ditto’ reaction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 과연 우리는 만난 것일까? 나의 뇌는 불완전한 지각의 단편들을 끌어모아 사실의 환영을 만들고 나름의 기억을 재생한다. 영화처럼 현실 속 관람객들은 자신 만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각이라는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들고 세계를 관찰하고 있다. 비디오 테이프에서 촬영자(나)와 대상은 서로 반응하고 있지만, 스크린에 영사되는 필름 속에서 관람자는 소외되고 부재한다. 테이프에 저장된 정보는 나의 감각 세계와 욕망을 시간 안에 붙들어 맬 수 있다. 비디오카메라에서 촬영자가 직접 기기를 조작하고 통제하기에 대상과 교환하는 시선이 드러난다. 나는 현실을 비디오라는 저장장치에 내가 사로 잡고자 하는 사실과 욕망을 대상으로 투사하고 붙들어 맨다. 그리고 이것은 곧 사실적인 시간이 된다. 그렇게 소유한 나의 사실들은 (온전하게 보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매체, 필름이나 다른 방식의 포맷에서 나는 '부재'한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년)' 처럼. 재현의 방식에 따라 나와 대상들은 그 관련성을 영원히 수수께끼 처럼 변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녀들'이라는 그림 속 여러 인물들은 여러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받으며 상호 연관성이 있는 현실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화가 자신이다. 그림의 중앙에 배치된 거울 속에서는 국왕 부부가 비치고 있다. 관람객들이 나타나야 할 거울 - 시선의 반대편에는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그려진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환영의 주관자로써 우뚝 서 있으며 재현된 이미지인 대상들이 그려질 뿐이며 심지어 응당 나타나야 할 관람자로서의 '나'는 지워진다. 마치 카메라의 렌즈와 마찬가지로 캔버스의 뒷편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함께 인물들은 보는 우리는, 현실의 주체로 존재한다기 보다 재현된 그림으로서의 환영인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들은 사건이나 향수와도 같은 구체적 에피소드들이 아니다. 현실 속에 항상 도사리는 망각과 왜곡이라는 우리 스스로의 기재들 - 바로 그 '상실'이 근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보다 더 근원적인 떠올림 같은 것들이다.
비디오카메라를 든 소녀는 나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상징하는 것 같다. 혹은 욕망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의해 현실적으로 부재하는 - 우리의 실존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소녀의 전체적인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온전하게 볼 수 없다. 나의 무대는 항상 캔버스의 뒷편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지하는 방식은 감각적으로 '만나는 대상을 의미로 치환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기억으로 남긴다' 고 한다. 재현되는 (기기에 시각정보를 담아내는 저장장치들) 포맷들은 제 각각의 방식으로 기억과 시간들을 붙들어 맨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또한 제 각각의 방식으로 부재한다. 한마디로 뇌신경학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카메라가 대상을 순차적인 흐름 속에 위치 시키는 문법들은 뒤틀림이라는 몽타주에 의해 근본적 착시 현상이라는 오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시간'을 우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착시 오류가 바로 스스로에 관한 거울식 왜곡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도, 가장 객관적인 카메라에 의해서도 매우 불완전하게 재생될 수밖에 없는 소외의 그림자들 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뉴진스 New Jeans 뮤비에서 고정적인 어떠한 해석도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나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것을 비켜나게 된다. 예컨대 팬들과 뉴진스의 관계, 교통사고로 발생하는 이별이라든가 하는 꿈의 해몽 같은 분석들 말이다. 뮤비에서 암시적인 에피소드는 존재한다. 어떠한 종류의 이별이나 극적인 깨어짐 같은 것들 처럼. 우리가 느끼는 슬픔들은 사건이나 향수와도 같은 구체적 에피소드들이 아니다. 현실 속에 항상 도사리는 망각과 왜곡이라는 우리 스스로의 기재들 - 바로 그 '상실'이 근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보다 더 근원적인 떠올림 같은 것들이다. 절대적인 상징으로 역할하는 사슴과의 시선 교차 등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영상은 하나의 알레고리(우화)로서 영원한 의미의 연쇄만이 발생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마디로 이 영상의 서사는 하나의 반서사이다. 즉 '이야기하는 척 하기'인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질문은 나로 향한다. - 나는 과연 나를 만난 것일까? 영상에서 처럼 부재나 죽음은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재생 미디어)의 가장 미학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심미적인 메타포로도 작동한다. 이찬혁이나 뉴진스, 레퍼 감비노 Childish Gambino 가 전개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시각경험이 주는 공감대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주의하자. 단지 자본의 기획과 유통 안에서의 기술적 세례라고만 치부하기엔, 전통적인 비판 미학 역시 대학 강단이라는 유통 구조 안에서의 실험이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 뮤비가 K-pop 뮤비라는 장르적인 끌리쉐 안에서 이러한 기법적 서사적 시도를 이루어 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발랄하고 리드미컬한 밝은 무드와 안무가 이러한 기법적인 서사가 지닌 존재론적인 슬픔을 더더욱 부각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만날 것일까? 카메라와 시선은 언제나 대상을 담아내지만 우리 모두는 제 각각의 저장 장치 안에서 남겨진 의미로만 만든 기억이라는 테이프를 보관한다. (시녀들과 같은 그림이라는 프레임 속 인물들 처럼 상호 교환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다양한 대상들의 관계와 응답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나만의 망상이라고 하기에 우리들의 사건 속 감정과 상실들은 너무나 생생하다. 쟝 보드리야르나 미셀 푸코처럼 단지 문화들과 우리들의 현실이 지닌 허무를 강조하기는 너무나 성급하다.
가장 유일하고 특별하게 교차되는 두 남녀의 시선은 (비디오를 든 소녀와 남학생) 마치 특별하고 기이한 사건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 남학생은 왜 나를 알아 보았을까? 관람자가 아닌 존재론적인 응시 - 유일하게 나의 부재가 의미있는 시건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 시간들 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어쩜 우리가 유일하게 존재론적 희망을 가져볼 만한 부분 역시 ‘사랑’이라는 속성을 지닌 관계들 - 약간은 진부하지만 고전적인 교훈에서 찾아봄직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는 수많은 우화들이 남기는 지혜들이 있다. 잠들어야 하는 밤마다 우리들을 위협하며 안정제를 찾게하는 골리앗의 존재는 무엇일까?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린 데에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 공포의 허상을 극복할 만큼) 욕망이 교환되는 시선들과의 대응 속에서 스스로의 진부한 ‘보는 방식’을 이긴 것도 크게 한몫 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