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정원 퍼포먼스 행사 참여후기
그날 정원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잠깐 비치는 햇살에 기대 섞인 희망이 스치기도 했지만,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쉽게 멈출 기세가 아니다. 며칠 전, 도모헌에서 열리는 ‘각자의 정원’ 작가 퍼포먼스와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모더레이터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마침 그 자리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행사 당일의 날씨는 그런 종류의 행사를 개최하기에 썩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도모헌이라는 장소는 원래 부산시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리뉴얼된 후, 2024년 일반 시민들에게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그 장소 자체도 처음이기도 했고 비교적 젊고 매체의 배경도 다양한 작가들의 퍼포먼스라는 표현 방식에 대해서 왠지 오래된 익숙함과 낯선 생경함을 동시에 함께 불러일으키게 했다.
‘각자의 정원’이라는 퍼포먼스는 1년 전 복합문화공간 헬맷에서 ‘각자의 개변’이라는 전시를 연 이후, 일종의 후속 전시나 보고서인 성격의 행사인 셈이다. 단발성의 전시와 행사가 수없이 열리는 문화계이지만 작가들이 이를 이어가며 지속적인 과정이나 사유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열린 만남들은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형식인 ‘작가 퍼포먼스’도, 사전에 배경지식이 전혀 없던 참여 작가들도, 모두 당일 모더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지게 만든 요소들이었다.
다행히, 내가 막 도착한 1시 30분경 오전 내내 정원에 뿌리던 비는 잦아들었다. 기묘하게도 자연은 그렇게 축복처럼 때때로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비가 그친 그날의 초록빛의 빈 여백이 그날 <도모헌>을 방문한 구경꾼이었던 우리 모두에겐 ‘정원’이 되었다. 퍼포먼스는 정확히 2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아무런 배경과 익숙함이 없었던 그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우연과 공감이 뒤 섞인 ‘만남’이라는 선물을 선사해 준다. 오히려 그 낯섬이야 말로 그날 그 공간에서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주었다.
두 사운드 아티스트의 음향이 도모헌 정원 위로 흘러 나오며 작가들의 퍼포먼스는 시작되었다. Teari Kim 과 선진은 전자음악 DJ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이다. 이 두 사람의 음향은 퍼포먼스 시간 내내 정원에 음향과 자연의 깊이 있는 울림들을 전달해 주었다. 김태리는 자연의 흐름과 아름다운 깊이감 속의 모호한 영역에 존재하는 소리와 이미지의 특징들을 사운드로 표현하는 아티스트이다. EDM과 테크노, 실험적 사운드를 폭넓게 아우르는 평소 스펙트럼과는 달리 완전한 자연 공간 위로 흐름이 있는 자연음향과 새소리를 연출하여 공간과 사운드의 교차지점을 뒤섞는 음향연출을 시도했다. 우리가 공간을 생각할 때 단지 깊이를 떠올릴 때가 많다. 그렇지만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공간 위로 시간이 드리워지는 것을 깨닫는다. 정원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색채와 움직임 위로 ‘시간’이라는 비가시적 조건이 드리워지고, 그 속에서 소리가 파동처럼 퍼져나가며 공간에 깊이를 더했다.
선진은 무의식적인 소리의 상태를 한국적 감성과 음향으로 풀어나가는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 자연 위로 내내 관객들을 자극하는 사색적 사운드스케이프는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공간에 머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며 무의식 깊숙한 곳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사운드 퍼포먼스는 미술적인 표현 영역에서 색다른 다채로움과 한편 쏟아지는 비트나 팝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변별력을 전달하기에 실패할 위험도 동시에 지닌 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테리 킴과 선진은 정원의 여백과 자연성에 기반해 절제와 감각의 균형을 훌륭히 유지하며, 공감각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작업이 환기시킨 것은 공간이란 본래 울림을 내포한 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의식과 무의식, 이미지와 소리 사이의 긴장과 교차 속에서 발생한다. 이날의 정원은 단지 형체의 운동으로만 채워진 장소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흘러가는 소리와 풍경, 그리고 그 감각의 공명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정서적 정원’이자 ‘감각의 장’이었다. 두 사운드 아티스트의 사운드는 공간이라는 조건들 속에서 소리라는 비물질적 매체가 어떻게 하나의 장소를 기억, 정서, 시간, 풍경으로 변모시키는 캔버스가 될 수 있는지를 인상적으로 남겨 주었다.
손한올 작가는 텍스트로 뒤덮인 의자로 고정시킨 기다란 천 위로 한 시간 반 내내 ‘사랑해’ -라는 글자를 써 내려갔다. 처음 40분이 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천의 반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이 완결보다는 과정에 머무는 퍼포먼스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1시간 30분이 되자 작가는 빈틈없이 ‘사랑해’라는 글자로 천을 빽빽이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진성성’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긴 한데, 한 시간 반 동안 땀방울을 천위에 뚝뚝 흘리며 자세한 번 고치지 않고 새겨 놓은 작가의 ‘사랑한다’는 그 고백에는 무엇이 눌러 담겼을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작가 토크 시간에 작가가 ‘일종의 반성문과 같다’ - 는 말이 나의 뇌리에 쏙 들어온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뱉는 말들, 그 속에 따라 달려오는 통속적인 어감이나 자기 현시들을 그 시간 동안 일종의 고행의 행위를 통해 반성한다는 뜻이었을까? 작가는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나 (의자의 표면 위를 작가 스스로 빽빽하게 글자로 뒤덮었던 것처럼) 이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 모두를 반성하고 싶어 한다. 나는 작가의 그 행위 자체가 지닌 무목적성이 오히려 우리가 지시하는 언어의 배반들을 가시화하고 게임, 투쟁, 자기 현시로 변한 본질에 관한 - 행위의 진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한 시간 반 동안 사진이나 정보가 아니라, 그를 함께 지켜본 사람들만의 공감대라는 점에서 작가의 연극적 시간에 가장 투철한 환기를 심어준 퍼포먼스였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쓰기 위해, 먼저 말을 의심했다. 그 반성적 행위 속에서 비로소 언어는 다시 살아났다.
한 시간 반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나타나지 않은 작가가 있었다. 김등용 작가는 부재의 퍼포먼스를 제안해 주었다. 단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시점을 분명히 표명하고, 개입하고, 관찰했다. 작가의 관점은 현장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화면은 스마트폰 라이브로 함께 관찰하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송된다. 보이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그렇게 정원으로 접속했다. 김등용 작가는 자신이 관찰하는 도모헌 정원 주변부를 관객들과 함께 신중하게 관찰하며 신중하게 흔적을 남긴다. 미시적인 자연의 작은 조각들은 나무의 표면에, 돌 위에, 벤치의 바닥면에 세밀한 자신 만의 표식으로 남겨진다. 자연의 작은 조각들이 그의 주의 아래 하나의 좌표가 되고, 그 좌표는 화면과 현장을 가로질러 중첩된다. 작가의 행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그만 흔적을 남김으로써 모두의 정원 속에서 다차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행위에는, 낯설고 불편한 행위의 강박을 미술적으로 끌어 모으고 패턴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버려진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의 성격이나 정체성은 어떤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잘 배열된 로직은 사실상 나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김등용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려 준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순간이나 신체의 부산물, 자연의 미세한 조각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점진적인 형채로 발전시키는 일견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의 신중함으로 모으고 재배치하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성격, 실존적으로 내가 존재에 응답하는 방식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동시에 그는 관찰과 흔적 남기기를 화면 플랫폼 위로 확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찰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동시에 전개시키며 선택한 김등용 작가의 기술적 프로세스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김등용의 작업은 그 장을 가볍게 비틀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남기며 어떤 질서로 스스로를 설명하는지 되묻게 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현존으로 기억된다.
정원에 거울이 드문드문 보였을 때, 꽤 흥미로운 장식적인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참여자들에게 거울 위로 그림을 유도하며 낙서에 가까운 추상적인 행위들을 유도해 내었을 때는, 그림이라는 행위에 숨은 - ‘재현’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조용히 호출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김은지 작가는 그간 설치미술과 매체를 통해 인간이 형상과 세계를 인지하는 과정을 다각도로 탐색해 왔다. 이날 퍼포먼스에는 정원 주변에 드문드문 배치된 거울을 통해 우선 관객들은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고 그 표면 위로 작가가 준비한 물감과 펜으로 직접 드로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비정형의 거울 위로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들과 그림들이 움직여 가며 서로를 덧칠해 가는 모습들은 흥미로운 변화를 선사해 주었다. 김은지 작가는 이 거울들을 오가며 다시 작가의 터치로 시간과 행위들이 겹쳐진 그림들을 완성해 내었다.
여기서 거울은 단순한 반사판이 아니다. 거울에는 정원으로 확장된 공간이 담겨 있지만 한편 참여자들의 내면도 아울러 내는 경계의 그림자로써 그림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김은지 작가의 정원은 자유롭고 개방적이지만 작가의 주관도 확고하게 드러나는 그림에 관한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반사와 덧칠, 지우기와 다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추상과 재현은 서로의 영역을 침투한다. 우리가 인지하는 외부세계, 즉 정원이라는 공간에는 매체를 통해 재현된 이미지가 담김으로써 그것은 누구에게나 형상이라는 인지적인 의미로 변한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울처럼 내면과 대화하는 정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김은지 작가가 제시하는 정원이란 ‘어떻게 인지하고 관계했는가’에 대한 기록, 즉 관객과 작가가 공동으로 제작한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지각의 지도에 가깝다.
이날 5명의 의욕에 넘친 작가들의 (좋은 의미로서의) 순진한 열정을 마주한 것은 개인적으로도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우연하게 그날의 ‘각자의 정원’을 마주한 관람객들에게도 무척이나 새로운 만남들을 선사해 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날 도모헌의 정원은 이들의 퍼포먼스와 사유들이 경계를 횡단하는 장소로서 꽤 울림이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퍼포먼스라는 용어에 함의된 ‘아방가르드’라는 것이 현재에도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나는 최근에 이어지는 미술용어나 각종 강연 형식에 조금 지루해하던 차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 날 나에게 선사해 주었던 작업은 바로 현장에서만 가능한 ‘일상성’과 ‘장소성’ 바로 그 자체의 에너지로 다가왔다. 도모헌이라는 정원은 그러한 감각의 교차들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고 플랫폼이 되어 주었다.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어쩌면 외부공간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작가의 유동적인 작업실의 내면 풍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했다.
60년대 실험그룹들이 시도했던 무조음악이나 무의미를 나열하는 그런 형식의 퍼포먼스는 아마 다시 되살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날 정원에서 시도되었던 일종의 하이브리드적인 경계의 교차들은 아마 적합한 공간과 연결들이 만났을 때 창발적으로 발휘될 것 같다. 단발성의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전시나 퍼포먼스는 아카이빙과 네트워크로 계속 확장되어 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방식이 극복할 수 있는 개방적 잠재력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지역성이라는 조건을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자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소의 고유함과 작가의 개별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진정한 교감이 발생하고, 이는 관객에게도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그렇게 ‘지역성’은 감각 확장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기획에서 ‘정원’이라는 단어를, 아마도 물리적인 공간을 있는 그대로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에서 이미지로, 텍스트에서 회화로, 행위에서 영상과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감각과 매체의 교차 - 누구도 배재되지 않으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공존하게 되는 만남의 연결점들. '정원'은 아마도 이러한 ‘관계망’들을 메타포로 아울러 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상과 현장에서 뚜렷하게 공존하게 되는 장소특정적 맥락과 지역성을 함께 아울러 냈던 ‘각자의 정원’은 지역 예술계의 희미하지만 의미 있는 잠재력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한 행사였다. 다양한 매체와 감각을 번역하며 행위의 다층적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가능하게 했던 작가 구성과 장소 친화적인 기획을 함께 아울러 냈던 기획자 유창희의 구성력도 함께 눈여겨보게 된다.
때맞춰서 멎은 비 덕택에 그날 5명의 작가에 의한 ‘각자의 정원’은 매우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아방가르드가 소멸하는 시기에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예술지평에 관해 떠올려 보게 된다. 그날의 정원처럼 지금 여기, 우리의 정원은 늘 햇살이 비치는 장소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우리는 진부하지 않게 우리를 일깨우는 훌륭한 우연들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예술적인 일깨움이다.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선과 경험을 하나의 시간 속에 투영함으로써 분명히 정원이라는 하나의 연결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칭하는 단어가 현재로선 달리 없기에 일단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로 유보해 놓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