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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Jul 12. 2016

황금 파도
15화

최민석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지만얻을 것은 이 세상이다세계의 노동자들이여단결하라!” 

칼 마르크스(1818-1883)




#15



중앙방송에서 토론을 마치고 나온 기혁은 보좌관이 운전하는 카니발에 올라탔다.


아니의원님어쩌려고 이번에도 터트리신 겁니까


보좌관 손현욱의 질문에 기혁은 그저 간단하게 답했다.


저는 시간을 조금 당겼을 뿐입니다



백미러로 기혁의 얼굴을 보며 반문하는 현욱에게 기혁이 답했다.


누가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현욱은 애써 기혁의 속내를 듣고 싶어 재차 물었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 누군가는 할 말이었습니다단지저는 조금 서둘렀을 뿐입니다


그러자, 현욱이 운전대를 꽉 잡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의원님


그러다, 무슨 기운에 취했는지, 곧장 말을 정정했다. 


아닙니다지금도 늦었습니다의원님평등한 세상이 와야 합니다일괄적인 평등이 아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합리적인 분배로 더불어 사는 사회. 1%의 금고에 현금이 쌓였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성장했다고 말하지 않고, 99%이상의 국민이 웃을 때 참된 성장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계층 간의 혐오가 허물어지고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회모두를 이웃으로 생각하는 사회정부는 국민을 위해 일하고국민은 정부를 신뢰하는 사회국민 모두가 공동체의 선과 발전을 위해 열띤 토론을 하고치열히 고민하고뜻을 모으는 사회그런 사회를 저는 항상 꿈꿔왔습니다!


이제야 밝혀서 미안하지만, 현욱은 다언증(多言症) 환자다. 게다가, 언젠가는 자신도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정치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스스로 국회에 뛰어든 야심찬 보좌관이다. 때문에, 골방에서 ‘넬슨 만델라’, ‘마르틴 루터킹’,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등의 세계 평화에 기여한 정치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자신이 이끌 국가상을 언제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 말문만 트여준다면 그 자리에서 책을 한 권 쓸 분량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다. 그간 꾹꾹 눌러왔던 사고(思考)의 댐이 더 이상은 둑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린 것이다. 여전히 현욱이 말하는 사이, 기혁은 생각에 잠겼다. 


적폐적폐를 없애야 한다!’ 


기혁은 달리는 차창으로 밖을 보았다. 정민과 통화를 마친 후, 하늘을 봤을 때처럼 달이 구름에 갇혀 있었지만,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세상이, 편견이, 제도가, 아직은 기혁의 뜻을 가리고 있을 지라도, 그 빛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혁은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혁을 가로 막는 이들이 너무 많다. 당장, 도움을 줘야할 당대표부터 기혁을 반대하고 나섰다. 주세법을 발의하자마자, “뭐 하는 짓이냐?!”며 윽박질렀고, 좀 전에 통화를 한 정민도 “제 정신이냐”며 질책했다. 게다가, 윤승민. 도대체, 윤승민 의원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기에, 자신에게 그런 협박 편지를 보낸 것일까. 정말 그가 보낸 게 맞기는 한 것일까. 


…… 그러니까기업주가 노동자를 존중하고노동자는 사용자를 신뢰하고건물주가 세입주를 생각하고세입자는 임대한 공간에 주인의식을 가지고의원님이거 좀 들어보세요


현욱은 자신의 원대한 꿈을 설명하다 말고,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 윤승민 의원이 복당했습니다한국당은 오늘 당내회의를 거쳐윤승민강길붕안상순윤상헌 의원이 제출한 복당 신청서를 승인하기로 결정했습니다이로써 한국당은 명실상부한 원내 1당 자리를 되찾았습니다공천탈락에 불복해 탈당했던 주호용장재원이철구 의원까지 복당하면 한국당의 의원수는 129명이 됩니다현재 민중당의 의원수는 122명입니다.

아울러복당한 윤승민 의원은 지난 2일 미래포럼을 발족했습니다새정치를 연구한다는 미래 포럼에는 한국당의 소장파인 남정필원이룡정지석 의원이 함께했습니다당내 주축 세력과 손잡고복당까지 한 윤승민 의원은 이로써 차기 대권주자 후보로 발돋움하게 됐습니다하지만 윤승민 의원은 대권 행보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미래 포럼은 앞으로 더 나은 우리 사회를 도모하기 위해연구하고 고민하는 단체일 뿐더 이상의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본인은 부인했으나벌써부터 정치권은 윤 의원의 움직임에 술렁이고 있습니다여의도에서 KBS 성한용입니다


보도가 끝나자 마자 현욱이 분개했다. 


간상 모리배당에 잘 보이려고 별 짓을 다하는군요그때 그 편지그걸로 복당한 거 아닙니까?! 


차 안에 라디오 뉴스와 현욱의 불만이 뒤섞여 소음이 가득했다. 여의도를 지나, 어느덧 합정동에 도착한 기혁은 노이쾰른 앞에 내렸다. 그리고 밀맥주를 한 잔 들이키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이쾰른의 맥주 맛은 여전히 기혁을 흥분시켰다. 




                                                                                    *



고층빌딩이 즐비한 여의대로 24번지에 우뚝 솟은 한 건물.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명목 하에 생긴 경제인 단체. 이 건물 앞의 비석에는 ‘전국경제인 연합회’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세계적 불황의 여파로 위기에 처해있습니다그럼에도 전경련 소속 기업들은 한국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자임해왔습니다내수를 진작하고고용을 창출하고수출에 이바지하여 죽어가는 경제를 소생시킨다는 각오로 뛰어들었습니다


기업경제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논평을 발표해온 전경련. 하지만, 기자회견을 연 것은 이례적이다. 앞머리를 3:7 비율로 정갈하게 넘긴 홍보팀장이 안경을 매만지며 원고를 읽었다. 


이 모든 것이 국가 경제와 민생을 살리고자 저희 민간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기울인 노력입니다저희 기업인들이 정부와 정계에 바라고 요청한 것은 없습니다


곳곳에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노트북 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가계인구 500만의 생계를 책임지고계열사까지 직간접적으로 1500만 이상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경련 소속 기업들을 위해 세금 감면 혜택을 주지는 못할망정기업이 연구개발과 성장을 위해 조성한 유보금을 내라는 것은기업죽이기는 물론국가경제를 뒤흔드는 자살행위입니다


홍보팀장은 원고를 읽다가, 연습한대로 녹화중인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강조하려는 의지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저희 전경련은 국가경제를 이끌어온 기업에게 유보금을 내라고 한 민중당 장기혁 의원의 정치적 행동을 규탄합니다이것은 현대판 백골징포입니다경기활성화 방안을 강구하지는 않고기업과 경제인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징수하는 악법도입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논평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기다려졌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만약, 그 순간에 기자들의 질문을 모두 타이핑해 출력했다면, 인쇄지가 기자회견장의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



다음날 아침, 미산 그룹 회장실에는 간만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혈색마저 좋아진 듯했다. 


하하장기혁이이 풋내기 자식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김 실장이 펼쳐놓은 조간신문에는 ‘초선 의원의 세금법, 가렴주구인가?’, ‘장기혁의 과도한 부자증세법’,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 기업들’, ‘한국당, “장기혁의 발언은 현대판 황구첨정”’ 등의 헤드라인과 칼럼 제목들이 즐비해있었다. 대부분 기업체의 광고로 수익을 올리는 신문들이 쏟아낸 기사였다. 논조는 하나같이 장기혁의 증세법 비난일색이었다. 보수성으로 정평 난 동양일보는 ‘맥주에 홀려 세금 폭탄 투하한 장기혁’이란 헤드라인으로 1면 톱을 할애했다. 아울러 기사 말미에는 이 모든 문제가 무리한 주세법 개정안 때문이라며 힐난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미산 그룹 회장이, 전경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바로 4년 전 회장이 그였다. 그리고 2년 전 회장 역시 사돈인 이성전자 회장이었다. 이번 회장 역시, 그와 7천억 원대의 거래를 하는 동서제강 회장이었다. 게다가, 중안일보는 그의 사돈이 소유한 언론사 아닌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나라의 재벌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일이라면, 하나같이 단결했다. 미산그룹 회장이 여타 기업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준 것 역시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들은 좋게 말해, 협력 공동체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권력 유지를 위한 비리의 카르텔이었다. 


회장이 가장 흐뭇하게 읽은 것은 중안일보의 인터뷰 기사였다. 한국당의 중진 의원 서철원은 장기혁을 두고 “정치의 기본 원리인 타협과 상생을 모르는 얼치기”라고 했다. 서철원은 그와 한 달에 한 번씩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다. 미산 그룹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반발, 전경련의 성명발표, 여당의 압박. 회장은 원하는 각본대로 흘러가는 촬영장의 감독처럼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을 열고 한 직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홍보부장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숨은 가빴다. 김 실장과 회장이 동시에 부장을 바라봤다.  


큰일 났습니다회장님


왜 호들갑이야


회장은 귀찮다는 듯, 부장을 타박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홍보부장이 손에 쥐고 온 신문을 건넸다. 중앙 일간지를 모두 섭렵한 김 실장과 회장은 ‘이건 뭐야?’라는 표정으로 부장이 건넨 신문을 봤다. 회장의 눈이 제일 먼저 간 곳은 ‘경기 일보’라는 제호였다. 회장은 ‘아니. 이런 지방지도 있었나?’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기사의 제목을 보고, 몇 줄을 읽은 회장은 어떤 새끼야!”라고 고성을 지르며 신문지를 바닥에 팽겨 쳤다. 터키석이 깔린 미산그룹 34층 회장실 바닥에 신문이 반쯤 찢긴 채 떨어졌다. 그렇지만, 1면 톱기사의 제목과 바이라인은 여전히 웅변하듯 바닥에서 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기일보 1면은 이렇게 인쇄돼 있었다. 


‘36년간 한강물을 공짜로 써온 한강맥주!’


그 기사 아래 바이라인에는 산업부 진슬기 기자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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